“원자력 강국” 토대 닦은 이승만, “탈원전” 몽니 부린 문재인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3. 5. 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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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77회>

1954년 7월 28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이 연설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선양하며, 공산 침략을 막아준 미국에 진정한 감사를 표하고, 또 미국을 향한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하여 33차례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인터넷 이승만 기념관 자료실

식민 지배를 겪고 침략 전쟁의 폐허를 딛고 “대한민국”이라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초를 닦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도 하나 없는 나라는 결단코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가 없다. 세계 모든 문명국에서 국가 지도자의 기념관을 세우는 목적은 누군가를 미화하고 신격화하려는 게 아니라 앞선 세대의 고충과 한계, 노력과 업적, 시행착오와 위기 극복의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전수하기 위함이다.

호모 사피엔스, 역사를 학습하여 생존하는 존재

DNA 정보체계 속에 이미 정교하게 집을 짜는 기술이 들어 있는 거미와 달리 커다란 뇌를 가진 인간은 앞선 세대의 경험을 물려받을 수 있는 학습 능력만을 갖추고 이 땅에 태어난다. 호모 사피엔스는 유전자에 본능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최소화하고, 대신 뇌의 용량을 최대화하는 진화 전략을 택했기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인간의 뇌는 최고의 프로세서를 갖추고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하나도 안 깔린 첨단의 컴퓨터와 같다. 컴퓨터에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으면 깡통에 불과하듯 오랜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 두뇌는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인간의 진화는 학습을 생존의 기본 전제로 깔고서 장시간 전개된 신비로운 과정이다.

원시의 수렵인은 자식들에게 독버섯을 알아보고, 뼛조각으로 미늘을 만들고, 별자리를 보고서 방향을 찾아가는 생존의 지혜를 전수했다. 그처럼 우리도 선대의 지혜를 물려받아서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야 한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기에 체계적인 역사 수업을 받지 않고선 제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체계적인 역사 수업이 이뤄지려면, 전국이 통째로 박물관이 되어도 모자란다.

구미 국가는 어느 지방, 어느 소도시를 가봐도 골목골목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영국 옥스퍼드에 가면 사람들이 천 년 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수백 년 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신다.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산산이 조각난 독일 드레스덴 사람들은 전후 퍼즐 맞추듯 깨진 돌들을 다시 붙여서 유적을 하나하나 재건했다. 과거를 부정하고, 선대를 혐오하고, 전통을 무시하고, 역사를 조롱하는 뿌리 모르는 경박자(輕薄子)의 어리석음을 꿰뚫어 보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재앙이 닥친다. 역사의 험난하고도 복잡다단한 과정을 한 번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에 그들은 앞선 세대가 모두 부패하고, 무능하고, 탐욕스럽고, 타락했다고 단정하는 무학자의 만용을 부린다. 만용의 추태를 일삼으면서도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얼마나 몽매한지 깨닫지도 못한다. 며칠 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향해 “내란 목적 살인죄의 수괴”라며 험구를 놀린 그 신출내기 국회의원은 일례에 불과하다. 더 황당한 사건사례는 바로 1년 전까지 정권을 쥐고 흔들던 “586″ 세력이 이미 5년간 쉴 새 없이 연출했다. 단적인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1954년 8월 2일, 방미 중인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뉴욕시의 풍경. /인터넷 이승만 기념관 자료실

이승만이 시작한 원전 사업, 586이 파괴!

1954년 참혹한 3년의 전쟁을 치르고 잿더미가 된 신생 국가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원자력 발전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면밀하게 원전 건설을 추진했다. 원자력법 제정, 원자력연구소 설립, 원자력협정 체결,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한양대,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신설, 연구용 원자로 도입 등등, 다수 국민이 헐벗고 굶주리던 1950년대 이승만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숱한 도전과 난관을 묵묵히 뚫고 나갔다. 그 결과 1978년 대한민국은 최초의 상업 원전 고리 1호기를 건설했고, 2009년에는 한국형 원전 4기를 해외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부터 60년 넘게 꾸준히 단계적으로 쌓아 올린 한국 원자력의 금자탑을 문재인 정권은 “탈원전”의 깃발을 들고 일시에 무너뜨리려 했다. 정권이 교체되어 전 정권의 탈원전 정책엔 급제동이 걸렸지만, 서울대 원자력 정책센터 조사에 따르면, 그 잘못된 정책의 비용은 2030년까지 무려 47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승만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원자력의 큰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문재인은 세계 10대 부국의 통치자가 된 후 국가의 주력 산업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려 했다.

지식도, 정보도, 자본도, 인력도 태부족이었던 1950년대의 이승만은 백년대계의 원전 사업을 관철했다. 정반대로 넘치는 지식과 정보, 풍부한 자본과 물자, 최고의 인력과 넓은 해외시장까지 두루 다 갖춘 2010년대의 문재인은 다짜고짜 원자력 산업 기반을 파괴하려 했다. 이승만과 문재인, 두 사람의 리더십엔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최초 원자력 연구소 건물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인터넷 이승만 기념관

성실한 관리자 대신 경박한 선동가가 권력을 잡는 현실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을 탐구한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맥파쿼(Roderick MacFarquahar, 1930-2019) 교수는 지도자의 유형을 크게 관리자(managers)와 투사(militants)로 나눈다. 어느 나라, 어떤 조직에나 묵묵히 맡은 자리에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임무를 실행하는 관리자들이 있고, 누군가 힘겹게 쌓아 올린 업적을 경박하게 헐뜯고, 교묘하게 왜곡하고, 무도하게 깨부수는 투사와 선동가들도 있다.

마오쩌둥은 수억 인민을 쥐락펴락 움직이며 국정을 농단하고 국사를 어지럽힌 희대의 선동가였다. 반면 마오쩌둥이 망친 경제를 뒷수습하다 두 번이나 정치적으로 숙청당하고, 다시 일어나 개혁개방의 시대를 연 덩샤오핑은 전형적인 관리자였다. 물론 대중을 사로잡는 관리자도 있고, 관리 능력이 탁월한 투사도 있겠지만, 대체로 지도자들을 편의상 이념형(ideal type)으로 양분해보면 덩샤오핑 같은 관리자형과 마오쩌둥 같은 투사형으로 나눠볼 수가 있다.

정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실력 있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관리자들보다, 영악, 교묘, 사특, 무도한 선동가들이 대중적으로 더 큰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다수 대중이 관리자의 신중한 통치력보다 선동가의 부박한 정치술에 현혹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부조리한 현실은 사실 새롭지도 않다. 고대 그리스의 소규모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은 데마고그(demagogue)의 선동술에 놀아나는 최악의 제도라 여겨졌다.

1950년대 이승만이 일으킨 원자력 사업을 2010년대 문재인이 파괴하는 아이러니는 나라를 다스릴 준비도 안 된 자가 인기몰이로 권력을 잡는 선거 민주주의의 치명적 허점을 드러낸다. 관리자는 선전에 약하고, 선동가는 관리 능력이 없다는 현실, 바로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이다.

관리자형 지도자가 쌓아 놓은 업적을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무너뜨릴 때, 우리는 과연 무슨 수단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그러한 몰상식과 부조리를 막을 수 있는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를 해결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공정한 선거로 정권을 교체한 후 실정을 일삼은 전 정권의 위헌성과 불법성을 철저히 규명해 책임자를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

물론 그래봐야 무도한 파괴가 초래한 기회비용을 되찾을 수도 없고, 국고 손실도 만회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도자를 뽑을 땐,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선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무책임한 인간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7년 6월 19일 고리 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연설하는 문재인 전 대통령./연합뉴스

마오쩌둥, 김일성을 존경하고 이승만을 혐오하는 좌파의 미망

국가가 전 인민에게 일양적인 역사해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양한 가치관과 역사관을 용인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일수록 더더욱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절실하다. 그래야만 앞선 세대의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차세대에 효과적으로 전수할 수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큰 집의 기둥을 세우듯 자유민주주의 기본 제도를 건립한 인물이었다. 건국 후 2년이 못 돼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준비한 대규모 침략 전쟁을 당해 절멸의 위기에 빠졌음에도 건국 최초 4년 동안 이승만 정권은 토지 개혁을 완수하고, 선거권을 모든 성인에게 확대하고, 최초 4번의 민주 선거에서 투표율 90%의 국민 참여를 이끌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따라 양원제를 도입했다. 전후 초·중·고에선 대대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가르쳤다.

그 결과 3·15 부정 선거가 터졌을 땐, 4·19 정치 혁명의 드라마가 연출될 수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자유 진영 신생 국가와 비교해 보라. 대한민국보다 더 극적인 자유화, 민주화의 사례가 있는가? 완강한 신념의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이 한평생 독립운동을 하면서 오매불망 기원했던 바로 그 나라가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돌이켜 보면, 김일성 추종주의자든, 마오쩌둥 숭배자든, 주사파든, 민중파든, 누구나 제멋대로, 함부로 무도하게 “이승만”을 향해 쌍욕을 하고, 증오를 퍼붓고, 돌팔매질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 무절제의 방종이 헌법으로 보장되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야말로 자유와 민주를 확신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위대함을 웅변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초를 닦은 이승만은 기묘하게도 오늘날 민주주의를 망친 주범처럼 무차별 군중 폭력에 짓밟히고 있다. 반면 그와 동시대에 중국과 북한에서 인격신으로 군림하며 전 인민을 노예 삼았던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지금도 화려한 신전에 안치되어 있다.

“마오쩌둥 기념관”에 안치된 마오쩌둥의 시신. “위대한 영수, 위대한 도사(導師, 스승) 마오쩌둥 주석께서 불후(不朽) 영면하시다.”/공공부문

바로 그 점에서 지금껏 한국 정부가 초대 대통령 기념관 하나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이승만 독립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오늘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신전에는 죽은 그들의 시신이 썩지도 않은 채 전시되어 있음을 상기해 보라. 동아시아 정치사의 웃지 못할 부조리극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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