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인 이 남성의 눈가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습니다. 제법 미남인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지요. 사법당국으로부터 받은 제안에 굴욕감을 느껴서였습니다. 20살 연하의 젊은 남자와 음란한 행위를 하다 발각된 데 후 수사를 받는 상황.
그가 살았던 1950년대 영국은 보수적인 곳이었기에, 동성애는 엄연히 처벌의 대상이었습니다. 자괴감을 느끼는 그에게 당국은 두가지 옵션을 건넵니다. ‘감옥에 가거나, 화학적 거세를 하거나.’
호르몬 치료에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여성처럼 가슴이 나오는 신체적 변화가 따랐기 때문입니다. 굴욕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롱은 불 보듯 뻔했지요. 당대의 유명한 석학인 그에게 향할 따가운 눈초리도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행을 결정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선언했지요. “호르몬 치료를 받겠습니다.”
성적인 즐거움보다 지적인 유희를 포기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종전 이후의 그는 컴퓨터용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고, 1951년에는 수리생물학에 관심을 두기도 했었지요. 감옥에서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학문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학문을 위해 ‘거세’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는 ‘사기’를 쓴 사마천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생을 마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컴퓨터의 아버지, 동성애자이자, 화학적 거세를 받은 자, 수 많은 별칭이 그의 이름을 둘러쌉니다. 앨런 튜링의 이야기입니다.
천재 앨런 튜링에 사랑이 찾아오다
앨런 튜링은 영국 런던의 마이다 베일에서 1912년 태어났습니다. 귀족인 남작 가문이었기에 넉넉한 환경에서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을 보냈지요.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천재의 조짐을 보였습니다. 15세에는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미적분을 척척 풀어낼 정도였지요.
천재 소년에게 잊지 못할 우정이 찾아왔습니다. 같은 학교 남학생 크리스토퍼 모르콤이었지요. 둘은 과학과 수학을 공통분모로 가까워집니다. 방과 후에는 서로의 집에 방문해 여가도 함께 보냈지요.
튜링은 그에게서 모호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우정을 넘어선 애정이었지요. 하지만 얄궂게도 1930년 2월 어느 날, 모르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모르콤은 주님의 곁으로 갔어.”세균성 질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튜링은 슬픔에 빠져듭니다. 모르콤이 그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를 잃은 것을 넘어선 상실감이었겠지요. 튜링은 모르콤의 엄마와 연락하면서 그리움을 달래 나갔습니다. 그의 편지가 여전히 전해지지요.
“(모르콤처럼)훌륭하면서 매력적이고 자만하지 않는 동반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앨런 튜링의 전기를 쓴 학자들은 그의 성적 지향이 이때 형성됐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첫사랑을 잃은 뒤 국가의 부름을 받은 튜링
때론 시련은 삶의 동력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콤을 잃은 후 그는 더욱더 학문에 정진합니다.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1937년 1월에는 ‘튜링의 증명’을 발표하지요. 현대 컴퓨터의 중심 개념이 담긴 논문이었습니다. 그를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콤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7년 후, 그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열어갔지요.
“독일의 암호를 풀어라”
“독일의 암호를 풀어주게.”
시대는 영웅을 호명하는 법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영국에서는 더욱 그러했지요. 1938년 9월부터 영국 정부 산하의 암호해독기관 GC&CS 에서 근무합니다. 나치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는 중차대한 일이었지요. 당대의 천재였던 튜링이 이 자리에 앉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1939년 7월 나치 독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왕왕 들렸기 때문입니다. 암호 해독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순간이었지요. 결국 그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유럽의 모든 이들은 나치와 싸워야 했습니다. 군인은 전장에서, 노동자는 공장에서, 과학자들은 연구실에서요. 튜링의 자리는 당연히 연구실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최첨단 과학을 활용해 적의 공격 계획을 미리 알아야만 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에니그마라는 암호 기계를 통해 지휘 명령체계를 갖추고 있었지요. 에니그마 해독에 수십만 병사의 목숨이 달려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앨런 튜링의 존재감은 컸습니다. 독일 해군 암호 해독에 애를 먹던 때 반부리스무스( banburismus)라는 개념을 도입해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지요. 동료 암호학자 휴 알렉산더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튜링”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튜링이 이끄는 사단의 암호해독으로 세계2차대전은 2년 가량 단축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1400만명 이상의 삶이 전쟁터에서 스러지지 않게 됐었지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묘사처럼 그가 모든 걸 혼자 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니그마 해독의 필수적인 기계 ‘봄베’는 폴란드 암호국이 보유한 기존 제품 ‘봄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서입니다. 이미 위대한 과학자들이 일궈 낸 성과에 자신만의 해석을 더 해 ‘진보’를 끌어낸 것이었지요. 튜링을 조력했던 수많은 인재들도 함께 했음은 물론입니다. 외골수로 그려지지만, 사람들과 농담을 즐기며 사교적인 인물이었지요. 64km를 달릴 정도로 스포츠광이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연 앨런 튜링
“기계도 사람처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전쟁은 때론 모든 걸 파괴하지만, 가끔은 창조의 어머니가 되기도 합니다. 튜링은 전후 그가 암호 해독하면서 쌓은 지식으로 최초의 컴퓨터 엔진인 ‘ACE’를 설계합니다. 그는 이를 완벽히 구현할 지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를 대중에 공개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정보를 보호하는 ’공식비밀법(OSA)‘가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지요. 환멸을 느낀 그가 연구소인 NPL(국립물립연구소)를 떠난 배경이었습니다.
1948년에 새로 둥지를 튼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 수학과에서도 또 다른 혁신을 불러 왔습니다. 논문 ’컴퓨팅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을 발표하면서였습니다. 인공지능형 기계의 표준을 정하는 ’튜링 테스트‘를 공개한 것이었지요. 현시대가 열광하는 인공지능 서비스인 챗GPT 역시 앨런 튜링이 지평을 열었기에 가능했던 셈이지요.
전쟁의 영웅...그러나 국가는 그를 벌했다
그러나 그를 담기에는 시대의 그릇은 너무나 작았습니다. 특히나 그의 성적 지향은 사회의 보수성과 불화했지요. 튜링은 욕망하는 존재였습니다. 1951년 크리스 마스 즈음이었습니다. 영국 맨체스터 옥스퍼드 로드에서 시간을 보내던 튜링은 19살의 청년 아놀드 머레이를 만났지요. 둘은 어느덧 연인이 됐습니다.
한달 후, 튜링의 집에 강도가 듭니다. 머레이의 친구 소행이었음이 밝혀집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튜링과 머레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사법당국은 두 사람을 형법 규정에 따라 기소했지요. 당시 동성연애는 중대한 불법이었습니다.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화학적 거세를 받아 들이는 조건이었습니다. 그에게 학문은 포기할 수 없는 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의연히 말했지요. “의심할 여지 없이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테지요, 제가 한 번도 발견 못한 사람으로요.”
화학적 거세 조치를 받고 2년이 갓 지난 때였습니다. 1954년 6월. 그가 집안에서 쓰러진 채 발견 됩니다. 옆에는 한 잎 베어 문 사과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지요. 그 안에는 독극물인 청산가리가 있었습니다. 앨런 튜링은 자신이 가장 좋아한 동화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꼽았었지요.
냉철하게 세상을 인식해 온 과학자로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동화처럼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너무나 황망한 죽음. 이 때문에 그가 ’자살‘이 아닌 ’사고사‘를 당했다는 주장도 왕왕 나왔습니다. 화학적 거세 이후에도 (영화의 묘사와는 달리) 유머와 웃음을 잃지 않았기에 ’사고사‘에 힘이 실렸지요. (애플의 로고가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애플은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했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시민들은 튜링을 다시 호명했다
튜링 앨런은 1400만명의 삶을 구한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영국 사회는 그를 ’동성애자‘로 몰아세우며,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앨런 튜링이라는 삶의 촛불이 더 은은히 이어졌다면, 세계는 또 한 단계 변혁의 순간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도 그의 스토리를 끝낼 순 없었습니다. 2009년 8월, 영국의 프로그래머 존 그라함 커밍이 공식적으로 영국 정부에 요청합니다. “튜링을 동성애자로 기소한 것을 사과하라.” 3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의 서명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총리 존 브라운은 한 달 만에 “그에게 행했던 처우가 끔찍하다”는 성명을 발표했지요. 2014년 8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그의 사면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그가 사망한 지 정확히 6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한 발짝 더 나아갔습니다. 동성애로 처벌 받은 모든 남성에 대해 소급 면책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앨런 튜링 법’이었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는 때론 그 나라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혐오는 천재를 질식시킨다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었습니다. 기억을 천천히 돌아봅니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한 적이 있었는가를요. 한두 차례 정도 부끄러운 과거가 떠오릅니다. 손가락질 했던 그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일 수도, 걸출한 예술가일 수도,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리더의 자질을 갖춘 사람일 수도 있었겠지요.
설령 대단한 인물이 아닐지라도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것. 비록 그 대상이 동성일지라도, 혐오받지 않을 자격으로 충분한 이유입니다.
<네줄요약>
ㅇ앨런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의 암호 해독으로 종전을 2년이나 앞당겼다. 그가 구한 생명은 1400만명에 달한다.
ㅇ그는 전후에 컴퓨터 공학으로 인공지능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ㅇ1951년 20살 연하의 남성과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다. 2년이 지난 후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ㅇ 2014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면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처벌받은 동성애자를 사면하는 조치를 취한다. 사랑에는 죄가 없다는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참고 문헌>
ㅇ데이비드 리비트,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앨런 튜링과 컴퓨터의 발명, 승산, 2008년
ㅇB. 잭 코플랜드, 앨런 튜링, 지식함지,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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