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명문장 베껴 쓰기
“모든 것이 소멸해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해.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있되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거야.”
펜을 들어 노트에 이 구절을 따라 써 봅니다. 종이와 펜의 사각이는 마찰음, 손의 움직임, 그 손을 따라가는 눈동자, 마침내 뇌에 닿아 마음에 스며드는 문장의 의미…. 필사(筆寫), 즉 ‘베껴쓰기’는 아마도 남의 문장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겁니다.
앞서 소개한 문장은 에밀리 브론테 소설 ‘워더링 하이츠’의 한 구절.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주인공 캐서린은 어릴 적 함께 자란 고아 소년 히스클리프를 잊지 못하고, 운명적이면서도 광포한 사랑을 합니다. 이 문장에서의 ‘나’는 캐서린 자신, ‘그’는 히스클리프를 가리킵니다.
펜글씨 전문가 유한빈씨의 책 ‘필사의 시간’(을유문화사)에서 저 문장을 읽었습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50권에서 명문장 하나씩을 엄선해 엮어 펜으로 필사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루쉰 전집), “그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물살을 거스르는 배처럼, 쉼 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위대한 개츠비) 같은 문장들을 베껴 쓰다 보면 그 문장을 쓴 작가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책 읽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유한빈씨는 필사를 권하며 말합니다. “책은 읽고 나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 않나요? 필사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저 썼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쓰는 도중 궁금해서 뒷이야기를 술술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할 거예요. 이렇게 책과 친해져 보세요.” 이번 주말엔 읽고 싶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책을 꺼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베껴 적어 볼까요?
/곽아람 Books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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