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고요라는 위대한 유산

기자 2023. 5.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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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동요를 듣는다. 주위의 여러분이 1984년 제2회 MBC창작동요제 수상곡인 ‘노을’을 들어보라고 추천해주었다. 이 노래를 부른 권진숙 어린이는 당시 경기 평택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평택은 서해바다와 맞닿아 있고 평야가 드넓어 고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노을’의 노랫말에는 ‘가을바람 머물다 간 들판’과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그사이로 팔 벌린 허수아비의 웃음이나 고개 숙인 열매가 나온다. 모두 묵음의 풍경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우리에게는 얼마만큼의 소리가 필요한가? 소리 과잉의 시대를 살면서 여기저기에서 소리 때문에 다투는 장면을 자주 본다. 옛날에도 생활소음은 많았겠고 어쩌면 더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동요 ‘노을’과 같은 해에 발표된 노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의 가사를 보면 ‘엿장수가 아이 부르는 소리’ ‘가게 아줌마 동전 세는 소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신경을 자극하는 새로운 알림음들이 대폭 늘어났다. 곧바로 확인해야 하는 문자와 메일 수신음, 분초를 다투는 환승 교통수단의 안내방송, 재난문자의 경고음이 쉼 없이 울린다. 거리의 사람들은 전화통화를 하며 걷고 싸우고 협상한다. 소리의 아수라장 속에서 물건을 더 팔기 위한 호객의 소음이 쏟아진다. 온종일 데시벨 경쟁을 듣다가 귀가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소리에 대한 화가 쌓인다. 그 울화는 집 안에 흐르는 작은 소리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화난 귀에 둘러싸여 어린이가 자란다.

어린이를 둘러싼 소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림책 <할머니의 뜰에서>를 보면 주인공 어린이는 바쁜 부모를 대신해 할머니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는 폴란드계 이주자이고 영어에 서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소통은 조용히 이루어진다. 할머니에게 속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아이는 그림을 그려서 갖다드린다. 할머니는 그릇 밖에 음식이 떨어지면 기도하듯 입을 맞추고 건네준다. 먹어도 괜찮다는 뜻과 손자를 향한 사랑을 몸짓으로 전한다. 함께 폭우 속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를 구조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아이의 손금을 쓰다듬으며 실천의 이유를 전하려 한다. 덕분에 아이는 빗방울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된다.

어린이를 키우기에 지금 이 세계는 너무 시끄럽지 않은가. 정작 들어야 할 신호를 놓치는 건 아닌가. 엘에이 존슨은 “조금 더 많은 고요함은 어떻게 어린이의 성장을 돕는가?”라는 글에서 소음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고 말한다. 신경생물학자 니나 크라우스에 따르면 어린이의 뇌가 어떤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가는 영양 공급처럼 중요하다.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조용했을 때 우리의 뇌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에도 주의를 기울였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우리들의 뇌는 도시의 온갖 소음 속에서 초과근무를 하는 셈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기후 위기 시대, 후속 세대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이를 조금 더 넉넉한 침묵 속에서 키우자고 제안하면서 세계적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조용한 장소들을 찾아 목록으로 만들어보자고 말한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는 교내 안내방송을 최소한으로 운영하면서 어린이를 갑작스러운 소리의 공격에서 지키고 있다. 어떤 선생님은 비장애인 어린이의 교실이지만 몇 가지 약속들은 수어를 쓰면서 지도한다. 침묵을 가르치는 것이다. 시냇물소리 같은 백색소음으로 소리의 가변성을 줄여주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집에서는 가족 모두 휴대폰 알림을 끄고 정기적으로 도서관이나 공원 같은 조용한 곳을 찾아가보라고 권한다.

침묵한다는 건 어린이가 스스로 도달하기엔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노력한다면 그들을 더 넉넉한 고요 속에서 키울 수 있다. 우리 모두 고요를 물려줄 방법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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