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국가주의가 강요한 ‘숭고한 희생자’… 그들의 침묵은 절규였다

곽아람 기자 2023. 5. 27.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책으로 이슈 읽기] 韓日 정상 위령비 참배로 본 히로시마

나의 히로시마

이실근 지음|양동숙·여강명 옮김|논형|208쪽|1만4000원

히로시마 노트

오에 겐자부로 지음|이애숙 옮김|삼천리|203쪽|1만2000원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35분 기시다 총리와 만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한일 정상이 이 위령비를 함께 참배한 것은 최초이고, 한국 대통령이 참배한 것도 처음이다. 참배에는 김건희 여사와 기시다 유코 여사도 동행했다. 양 정상 부부는 위령비에 헌화하고 고개를 숙여 10초간 묵념했다.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장을 지낸 박남주씨와 원폭 2세대인 권준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부위원장 등 한국인 원폭 피해 동포 10명도 참배에 동행했다. <본지 2023년 5월 22일 자 A3면>

◇사람 취급 못 받은 자이니치 피폭자

“열여섯 살의 나는 원폭 지옥을 눈앞에서 체험했다. 그런데도 사망자 14만명 중에는 약 3만명의 조선·한국인 피폭자가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를 사람으로 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히로시마 조피협) 회장을 지낸 이실근(1929~2020)씨의 자서전 ‘나의 히로시마’(2006)는 재일 동포, 즉 ‘자이니치’ 피폭자로서의 삶, 그리고 일본인만이 유일한 피폭자가 아니라고 전 세계에 외쳐온 여정을 담았다. 현재 국내에 소개된 히로시마 관련 책 중 드물게 원폭 피해 동포들이 겪은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하며 군인이 되길 꿈꿨던 조선인 소년이 ‘센징(鮮人)’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차별당하고, 피폭을 계기로 민족 정체성에 눈뜨게 되는 과정을 곡진하게 담았다.

자이니치 2세로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이씨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음 날인 1945년 8월 7일 입시피폭(入市被爆)을 당했다. 입시피폭이란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바로 피해 지역에 들어가 남은 방사성 물질의 방사선 영향을 받는 것을 이른다. 시골에서 쌀을 사서 도시에서 암거래하던 그는 가족들과 함께 고베에서 쌀을 팔고 야마구치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갈아타려 히로시마에 들렀다가 피폭당했다. 그는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히로시마의 거리 안에는 일곱 군데 강이 흘렀다. 모든 강에 갈대가 무성해, 조수간만으로 많은 시체가 걸렸고 사람들 눈에 쉽게 띄었다. 어디를 봐도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반짝반짝 비치는 지면에서는 코를 찌르는 듯한 송장 썩는 악취와 부패한 냄새만이 올라올 뿐이었다. 격심한 구토가 덮쳐왔고 공포심과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얀 저고리’의 피폭자 7만명

일본 패전 당시인 1945년 8월엔 240만명 가까운 조선인이 일본에 살고 있었다. 이실근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생활한 조선인은 ‘원자폭탄’을 맞아 두 도시 합쳐 약 7만명이 피폭, 4만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고 쓴다.

일본인 피폭자 조직은 1956년에 결성됐다. 원수금(원수폭 금지) 운동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원폭 피해자 운동 내에서는 ‘일본인 유일 피폭자론’ 이 제창됐다.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국’이며 ‘유일 피폭국’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전쟁 책임을 회피했다. “우리 재일 조선인 원폭 피해자의 존재감은 미미했고 사실상 ‘골짜기의 피폭자’로 세간으로부터 망각되었다.”

히로시마 조피협이 결성된 건 1975년 8월 2일, 조선인을 포함하는 원호법 제정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조총련 간부였던 이실근은 조피협 결성으로 총련 상층부와 마찰이 일어 일자리를 잃었다. 불고기 장사를 하며 활동을 계속했다. 1977년엔 히로시마 시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원폭 피해자 실태 조사 사업을 시작했다. 1978년 뉴욕서 열린 제1회 UN군축총회에 참가했고, 1979년엔 조선인 피폭자 삶에 대한 증언집 ‘하얀 저고리의 피폭자’를 냈다.

◇'숭고한 희생자’는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1935~2023)는 ‘히로시마 노트’(1965)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미치광이 조선인 할망구’라 불리는 히로시마의 한국 노부인을 언급한다. 노부인은 원폭으로 자녀 다섯을 모두 잃고, 자신도 목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양팔에 심한 켈로이드(피폭자 특유의 열상 흉터)가 있다. 오에가 읽은 신문 기사에 따르면 한때 “원폭을 투하한 미국을 저주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증오했”다는 이 노부인은 기독교 신앙으로 원망과 증오를 극복한다. “저는 일본인이라거나 한국인이라는 문제는 제쳐 두고, 자식을 다섯이나 잃은 어미로서 원수폭 금지만을 바랄 뿐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원폭 20주년쯤인 1964~1965년 히로시마를 찾아 피폭자들과 그 가족을 인터뷰한 이 책에서 공산당 계열과 사회당 계열로 분열된 반핵 단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정치색과 무관하게 전 국민적 평화운동을 펼쳐야 한다고도 말한다. 전쟁의 논리와 ‘내셔널리즘’의 그늘 아래 ‘숭고한 희생자’로 여겨져 ‘비참함의 정당화’를 강요받고 침묵해 왔던 피폭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폭자들은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참고서 절규의 목소리를 내었건만 곧바로 거대한 누군가의 손이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 동포들에게 우리 정부와 국민이 보여줘야 할 태도도 이러한 지지와 관심일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