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이쪽도 씹고 저쪽도 씹고 고독했다, 그래도 생계형 찬양은 안해”
[김아진 기자의 밀당] ‘모두까기’ 논객 진중권, 환갑에 돌아보는 25년
이 남자는 독설가다. 좌든 우든 인정사정없다. 한때 친구였던 조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까웠기 때문에 더 신랄했다. 진중권(60)은 “내 생각을 부정하면서까지 누구 편을 든다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라며 “원칙을 지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진중권은 1998년 우연한 계기로 논객의 길을 걷게 됐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극우세력뿐 아니라 주사파도 벌레 보듯 했다. 거침이 없었고, 모두가 그를 미워했다. 그렇게 논객이란 이름으로 25년을 산 진중권을 지난 10일 서울 홍대 근처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매사에 후회한다” “늘 고독하다”고 했다. 온갖 야유와 조롱에 시달려온 세월의 피로가 느껴졌다.
그러나 진중권은 금세 날카로워지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25년을 ‘조국 사태’ 전후로 나눴다. 조국을 ‘걔’ ‘국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렇게 살면 안 됐다”고 정색했다. “민주화 세력이 종말을 고한 거죠. 그 역사적 도장을 찍은 게 조국 사태였어요. 대중이 민주화 세력의 이미지와 실상 사이에 큰 괴리를 목격했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으니까요.”
◇“박정희, 김대중 모두 지나간 사람”
그의 삶도 조국 사건 이후 많이 바뀌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고, 안 치던 피아노도 다시 사들였다.
-처음에 어떻게 논객이 된 거죠.
“처음엔 화가 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1998년 어느 잡지에 미술사의 악마주의에 관한 글을 썼는데, 박정희를 찬양하는 맥락 속에 제 글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박정희를 고독한 악마, 낭만주의적 천재로 만든 거죠. 항의를 바가지로 하고 반론을 썼는데 지면을 못 준대요. 그 원고가 돌고 돌아 문학동네로 갔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 일이 25년 전이네요.”
-박정희 열풍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군요.
“글을 또 보냈는데 문학동네가 난색을 표하더라고요. 짜증이 났죠. 그래서 인물과사상으로 갔어요. 그쪽은 쿨해요. 더 쓰라고 자료까지 보내줬어요. 연재한 글을 묶어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냈죠. 조갑제 기자가 박정희를 찬양한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맞불 격으로요.”
-그런데 박정희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았더라고요.
“업적이 있으니까요. 그때 화가 난 건 박정희를 향한 게 아니었어요. 옛날 사람, 지나간 사람을 리바이벌한 것 때문이었어요. 지난 건 지나간 거예요. 지금도 비슷해요. 민주화 운동도 끝났어요. 김대중, 노무현도 이미 역사적 생명을 다한 거예요. 부활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글 실력은 어떻게 길렀나요.
“학창 시절 ‘이빨 쌈치기’라는 게 있었어요. 친구들끼리 서로 모욕하는데 화를 내면 안 되는 게임이에요. 상대의 속을 긁는 싸움을 하다 보니 말을 잘하기 시작했고 그게 글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지금은 반(反)민주당이라는 소리를 듣잖아요.
“아니에요. 민주당이 진짜 잘됐으면 좋겠어요. 안타깝죠. 제가 엑소시스트(퇴마사)에 관심이 많아요. 지금 민주당은 운동권이라는 귀신에 빙의돼서 그걸 내쫓으면 죽어버리는 상태가 돼버린 것 같아요. 젊은 사람에게는 광주, 87년 이런 게 없어요. 다 역사책 현대사편에서 보는 거죠. 2030에서 새로운 게 나와야 해요. 이준석이 저한테 ‘싸가지’ 없게 막 해도 제가 편들어주는 이유예요. 이제 넘겨줘야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의당 계열 정당에 입·탈당을 반복해왔는데.
“합법적 정당 운동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민노당에 입당했을 때는 굉장히 열성적이었어요. 보급투쟁도 하고 선거 때마다 카드 빚까지 얻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갖다 바쳤죠. 직접 뛰기도 하고요.”
◇“완벽했던 조국, 신은 공평하더라”
진중권은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뒤 인터넷에서 ‘거리의 언어’로 필봉을 휘날리며 유명세를 탔다. 그러다 2016년 트위터 계정을 돌연 폭파하고 사라진 일도 있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쏟아내던 그도 소모적인 논쟁에 짜증을 느꼈다고 한다. ‘조국 사태’가 터지자 그의 3년 침묵도 깨졌다.
-출마할 생각이 있나요.
“없어요. 1998년 글로 좀 유명해졌을 때 독일에서 (막 출감한) 임종석을 만났어요. 동·서독이 간첩을 교환했던 그리니케 다리를 걸으면서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물었죠. 진보세력의 정계 진출을 준비한다고 하더라고요. 잘했다고 했죠. 그런데 바로 민주당에 들어가는 거예요. NL에겐 혁명의 끝이 민주당이었나봐요. 정말 황당했죠.”
-논객 인생에 전환점이 있었다면.
“조국 사건이죠. 우리나라도 그 사건 전후로 나눌 수 있어요. 한국 사회를 이끌어왔던 두 개의 위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두 번째인 민주화가 종언을 고한 거예요.”
-무슨 뜻인가요.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산업화, 박정희 신화예요. 또 다른 하나가 민주화, 김대중·노무현 신화죠. 이 두 가지는 너무나 성공했기 때문에 종말을 고한 거죠. 산업화도 엄청나게 성공했고, 민주화도 이런 나라가 없잖아요. 민주화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게 조국 사태였습니다. 이제 기득권만 남았죠.”
-실망이 컸지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15년 동안 87년 세대도 기득권이 돼버렸어요. 이 사람들이 정치적 민주화에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민주화라는 게 다 생활 속에 있는데, 미시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자기반성이 안 된 겁니다.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하는 거죠. 진보 교육감도 자식 특목고 보내고, 동양대 총장 표창장도 위조해서 내 자식도 좋은 대학 보내야죠. 대중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조국과 친했죠?
“대학원 때 ‘주체사상 비판’을 같이 쓸 정도였어요. 동양대 교수 자리를 소개해준 것도 그 친구죠. MB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중앙대 겸임교수 자리에서 잘리고 필리핀에서 비행학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비행기 50시간만 더 타면 택시비행사 자격증도 딸 수 있었는데 그냥 거기 있을 걸 그랬어요. 사태가 터진 처음엔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거짓말을 했더라고요.”
-조국을 완벽하다고 평하지 않았나요.
“하하. 신은 공평하더라고요. 애는 착했어요. 근데 나 같았으면 마누라를 희생시키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아내 죄까지 내가 뒤집어 쓰죠. 내가 보수적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 뒤로 연락한 적 없어요.”
-내년 총선에 조국이 출마할까요.
“아마 할 거예요. 민주당이 재판 중에도 공천받을 수 있게 당헌을 바꿨잖아요. 나오라는 신호죠. 걔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그거밖에 없거든요.”
-그때 이후 ‘모두까기 인형’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누구나 다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잘못했으면 까야죠. 원칙을 어기면 안 되잖아요. 이게 윤리학의 기본입니다. 내 편을 생각하니까 내로남불이 되는 거예요. 나 개인으로 어떤 현상을 평가하면 되는데 어느 편에 충실하려고 해요. 유시민을 보세요. 실없는 사람이 됐잖아요.”
-유시민과도 틀어졌죠.
“과거에도 유시민한테 ‘노회찬, 심상정은 100% 믿는데, 당신은 50%만 믿는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공학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에요.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옳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느냐, 없냐죠. 참 멍청한 짓이에요. 세상은 ‘좁고 작은 너의 대가리’보다 훨씬 넓은데 그걸 간과한 거예요. 그 50%의 믿음도 조국 사태로 끝장이 났죠.”
-왜요?
“공론의 장이 무너졌어요. 지식인이 어느 한쪽으로 가버렸어요. 상징적인 게 유시민과 김어준의 관계죠. 김어준 같은 사람들을 위에서 걸러줘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밑에 들어가서 정당화해줬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지식인도 먹고살기 위해서 말이 안 되는 얘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사실 저도 떼돈 벌 수 있거든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쪽만 막 찬양하면 돼요. 그랬다면 벌써 강남에 빌딩 올렸죠.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워요. 저처럼 어느 편에 속하지 않으면 양쪽에서 다 욕을 먹어요. 견뎌야 하는데 쉽지 않아요, 그 고독.”
-고독하세요?
“늘. 저는 그 고독을 즐겨요. ‘나 자신’이라는 게 있는데 왜 헌납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잘못하면 누구라도 비판할 수 있어야죠. 나를 없애고 무리에 섞일 거면 왜 살아요? 삶의 목적이 없어지잖아요.”
-돈 벌 기회를 차 버린 거네요.
“저도 쓸 만큼은 벌어요. 고소득자가 된 지 꽤 됐어요. 여기저기 기부도 하고요. 나이 드니까 입 열면 꼰대가 되고요. 누가 출마한다고 하면 몇 푼이라도 보태주고 그래요.”
◇평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냉혹
누구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이라고 그를 평했다. 페이스북 댓글을 올리는 네티즌과도 생각이 다르면 싸우는 게 진중권이다. 그런 그도 “지나면 모든 게 후회”라고 했다.
-어떤 일을 후회하나요?
“너무 많죠.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어요. 평론이라는 게 순간순간 하는 거잖아요. 따끈할 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가 진 다음에 날기 시작하지만, 평론은 해가 뜰 때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역사는 지나고 나면 또 평가가 달라지죠.”
-구체적으로는요?
“안티조선 운동이 그랬어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는데 꼭 그랬어야 했나 싶어요. 조선일보 ‘밤의 주필’을 자처하며 매일매일 조독마(조선일보 독자 마당)에 보수를 비판하는 칼럼을 올리던 때는 유쾌했는데, 그런 일들이 오히려 지금의 정치 양극화를 가속화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안티조선 운동을 돌아본다면.
“우리가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할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가고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가장 잘한 건 뭔가요.
“2016년 트위터를 폭파시킨 거요. 팔로어가 86만명이었는데 그냥 날려버렸죠. 후회도 했지만, 가장 잘한 일 같아요. 제가 비일관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그때 뭔 얘기를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저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이재명 대표, 이제 내려와야”
진중권은 이날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여야 모두에 일침을 날렸다.
-혹자는 윤석열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이라고 하더라고요.
“글쎄요. 대선 경선 전까지만 해도 그를 빈 도화지라고 생각했어요. 옛날 보수 말고 합리적 보수, 중도가 용납하는 보수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구나. 근데 윤 대통령도 이미 그려진 도화지였어요. 결국 지난 대선은 윤핵관과 김건희 여사 때문에 이긴 게 됐죠.”
-조국흑서팀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그 뒤로 한 번 만났나 그랬어요. 재판 불출석으로 논란이 된 권경애 변호사는 말할 것도 없이 굉장히 큰 실수를 한 거고요. 그러나 베토벤의 말처럼 ‘꼭 그랬어야 했나’ 묻는다면 ‘그래야만 했다’고 답합니다.”
-문재인 정부 5년을 평가한다면.
“망했죠 뭐. 잘할 수 있었는데 기회를 다 날려버렸죠. 민주당이 코로나 열풍으로 총선 의석을 너무 많이 차지한 게 더 독이 됐어요. 그 이전에 조국 사태로 이미 한계치였지만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에게도 한마디 해주세요.
“대통령이 보수로 가는 건 좋은데 중도와 같이 갔으면 해요. 우경화로 가는 방식은 안 돼요. 이재명 대표는 사퇴해야죠. 본인 살려고 당을 볼모로 잡고 있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이재명을 안 만났다면 지금 살아 있을 사람들이에요. 이제 그만하고 내려와야 해요. 민주당에선 ‘대안이 없다’고 하는데, 이재명이 물러나는 게 대안이에요.”
◇즐거운 일만 하며 살고 싶다
진중권은 혼자 산다. 유학 때 만난 일본인 아내와, 대학을 다니는 20대 아들은 독일에 있다. 그는 4년 전쯤 홍대 근처에 17평짜리 빌라를 샀다. 문재인 정부 시절 부동산이 폭등하던 때 아파트가 아닌 이곳을 샀다. 복덕방 직원도 깜짝 놀라 먼저 1000만원을 깎아줬다고 했다. “테라스 때문이에요. 몇 평인지도 모르고 계약했어요.” 그는 고양이와 살고 있다. 매트리스와 피아노만 있는 작은 방이 진중권 방, 나머지는 고양이 방이라고 했다.
-살림이 단출하네요.
“책은 학교에 있고요. 필요한 게 별로 없어요.”
-외롭지는 않나요?
“고양이가 있잖아요. 20년 넘게 혼자 살았죠. 결혼이라는 걸 무겁게 생각 안 했어요. 한국에선 법적으로 총각이에요. 하하. 1년에 두 번 정도 가족과 만나요. 얼마 전에도 아내가 와서 한 달 넘게 같이 있었어요. 의전하느라 혼났네요. 사적인 얘기는 묻지 마세요. 닭살 돋으니까.”
-아들과는 대화가 되나요.
“일본어, 독일어를 번갈아 써요. 아들이 한국, 일본 국적인데 한국어는 과외도 붙이고 별짓 다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아들이 착해요. 잘 키웠어요. 말썽을 부린 적이 없고, 용돈도 필요 없대요.”
-정작 본인은 고등학교 때 싸움도 많이 했다면서요.
“정학을 3번 당했어요. 한번은 여자친구한테 집적거린 친구를 때려서였고, 두 번은 담배 때문이에요. 그래도 진짜 행복했어요. 정학을 맞아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해도 갔어요. 학교 앞 라면가게에서 주인 할머니 인생 얘기를 자서전 쓸 정도로 들었죠.”
-공부도 잘했잖아요.
“운이 좋았어요. 찍은 게 많이 맞았어요. 서울대 철학계열로 들어갔고 미학과는 그냥 이름 때문에 갔어요. 뭐 하는 곳인 줄도 몰랐고요.”
-집에 피아노도 있네요.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했으니까 강제로 띵땅띵땅 친 거예요. 안 치다가 조국 사태 이후에 기억력이 나빠졌는데, 손가락 운동을 하면 치매 예방이 된다고 해서 다시 치게 됐어요(웃음). 클래식을 쳐요. 베토벤의 비창 2악장 같은 거요.”
-앞으로 뭘 하고 싶나요?
“빨리 은퇴해야죠. 다 때려치우면 여행을 많이 하고 싶어요. 나중엔 일본이나 동남아 같은 데서 살면서 경비행기도 타고 싶고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거예요. 유튜브에서 정치 얘기 말고 철학, 미학 강의도 하고요.”
-논객은 안 한다는 말인가요?
“이제 지겨워요. 시사로 돈을 버는 게 사람을 지치게 해요. 이 사람 씹고 저 사람 씹고, 여기서 씹고 저기서 씹고…. 하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지치죠.”
진중권은 이날 “그때는 행복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서울 양정고 시절 친구들과 웃으며 미래를 꿈꿨던 그때, 독일 유학 당시 일일 식당을 차려 번 돈으로 전시회를 보고 음악을 들으러 다니던 그때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손수 만든 장난감이었다. “어릴 때 돈이 없어서 못 해봤던 거예요. 못쓰는 상자, 싸구려 렌즈로 망원경도 만들고요.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 장난감을 만듭니다. 이제 그림도 좀 그려볼까 합니다. 보이는 걸 드로잉으로 그리고 수첩에 딱 붙여 놓으면 뽀다구가 날 거 같거든요. 논객이 아니라 이게 진짜 제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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