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이 어려운 용어 쓰고, 만장일치 분위기 조성하는 까닭은

김민정 기자 2023. 5. 27.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저널리스트인 저자
전·현직 관계자 취재해 연준 재조명

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

크리스토퍼 레너드 지음|김승진 옮김|세종서적|468쪽|2만5000원

“찬성합니다” “찬성” “찬성” “찬성”… “정중히 반대합니다”.

2010년 11월 3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양적 완화 프로그램을 시행해 시중에 6000억달러를 더 푸느냐 마느냐를 두고 연준 위원 12명이 표결을 벌였다. 결과는 11대1.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이는 토머스 호니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장이었다.

양적 완화는 중앙은행이 없던 돈을 새로 만들어 이 돈으로 시중은행에서 장기간 돈을 묻어두는 상품인 장기채와 국채 등을 대규모로 사들이는 정책. 이렇게 은행으로 들어간 ‘새 돈’이 대출과 투자의 형태로 시중에 풀리면서 경기 ‘구원투수’ 역할을 한다. 이 당시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발 경기 침체를 지나 미국 경제가 천천히 회복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하지만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은 부진한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을 반전시키기 위해 돈을 더 풀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원제 The Lords of Easy Money)’은 11대1에서 반대자 ‘1′을 자처했던 호니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작년 3월 이후 금리를 올리며 긴축 정책을 펼쳐온 연준이 최근 “금리를 인상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제롬 파월 연준 의장)며 ‘금리 동결’ 가능성을 내비쳐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연준을 집중 조명한 책이 국내에 발간됐다. 경제 저널리스트인 저자 크리스토퍼 레너드가 호니그와 연준 전·현직 관계자들을 취재해 쓴 책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연준이 ‘제로(0%) 금리’와 ‘양적 완화’를 통해 행한 돈 풀기가 미국과 세계경제에 ‘자산 버블’과 ‘경제 양극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부동산·주식 등 자산 가격에 거품이 꼈고, 자산가들만 경제적 이득을 보는 식으로 부의 배분이 왜곡됐으며, 은행들이 내어준 어마어마한 대출 때문에 금융시장 전반에 불안전성을 불러왔다는 것이 핵심이다. “2008년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연준이 더 큰 불안정성의 토대를 만드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호니그를 비롯해 역대 연준 의장들의 정책 결정 뒷이야기를 담아 흥미진진하지만, 균형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음을 알고 읽는 것이 좋다. 호니그 외 찬성자 11인이 숙고 끝에 돈 풀기를 택한 이유나 만약 호니그의 의견대로 돈 풀기를 멈췄다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 우려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냉키 측 시선으로 보면 경제 붕괴 이후엔 가능한 한 공격적으로 나가는 것이 해법이었다. 앞서 1930년대 대공황 당시에 연준이 경기 진작을 위해 충분한 정책을 펼치지 못해 경기 침체가 더욱 심화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보면 세계 각국의 환율과 증시, 금리에 영향을 주고, 가깝게는 내 주택 담보 대출 금리가 올라가는 데 원인을 제공하는 연준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연준의 ‘아우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만장일치 표결 결과가 왜 많은지, 돈을 푸는 건 진짜 화폐를 찍어 배포하는 것인지 등 잘 몰랐던 내용들이 담겼다. 책에 따르면 연준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수십억 달러를 즉각 만들어 JP모건 체이스 같은 은행에 돈을 넣어준다. 연준 위원들이 암묵적으로 만장일치 결과를 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중의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연준의 결정이 ‘견해’나 ‘정치’가 아닌 경제 상황을 토대로 방정식을 풀어 답을 내는 절대적인 ‘수학’에 가까운 것처럼 여겨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5대7′ ‘6대6′ 같은 표결 결과는 곤란하다.

역대 최장 기간 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이 의장 재직 당시 의회 청문회 등에 나와 경제 지식이 깊지 않으면 이해하기도 어려운 ‘연준어(당시 ‘Fedspeak’라는 별명을 얻었다)’를 구사한 것도 비슷한 목적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연준의 결정이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독립적이고 접근 불가능한 영역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다. 정작 그린스펀은 연준 위원들과는 훨씬 직접적이고 쉬운 말로 회의를 이끌었다고 한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연준이 어려운 용어들로 진입 장벽을 세우고 이견을 받거나 조율하는 과정을 생략하면서 모든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의사 결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은 돈을 만드는 것뿐”이라며 “어쩌다 보니 수단이 매우 협소한 것 하나밖에 없는 기관인 중앙은행에 세계가 의존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이어 “취약해진 금융 시스템에 코로나 팬데믹의 타격이 닥쳤으며 연준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더 많은 돈을 새로 찍어내 왜곡을 증폭했다”며 “연준 정책의 비용과 위험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