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정 싫어! 끈끈한 거 더 싫어!
시골 작은 공동체의 끈끈한 정
사람의 마음 싹둑 잘라내는 요즘
서로 외면 않고 챙기는 모습 훈훈
2주 전, 올여름 내 먹을 고추며 호박, 가지, 오이,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평소보다 한 2주가량 늦었다. 지난해에도 날씨가 오리무중이라 모종 낼 시기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평년처럼 심으면 되겠지 싶어 심었다가 모종을 세 번이나 다시 심었다. 모종이 쌀쌀한 밤 기온을 견디지 못해 죽어버렸던 것이다. 나 같은 얼치기 초짜만 당한 게 아니다. 농사로 뼈가 굵은 어른들도 당했다. 기후변화 앞에서는 베테랑 농사꾼도 방법이 없다. 두 번이나 죽이고 겨우 살려낸 호박이며 오이는 저도 처음일 기후변화 앞에서도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처음 우리 집을 찾은 친구들은 구례의 끈끈한 정을 질색팔색 싫어했다. 그들에게 정은 쓸데없는 간섭이었다. 두 명이 식당 가서 남길 것 같아 밥 한 공기만 달라고 신신당부해도 구례 식당 주인들은 기어이 두 공기를 가져온다. 그거 먹고 젊은 사람이 어찌 힘을 쓰겠냐며. 셋이 가서 이것저것 맛보려고 네 종류의 음식을 시키면 하나는 알아서 안 준다. 왜 안 주냐고 항의했더니 주인 할머니 말이 가관이었다. “쩌것도 다 못 묵었잖애! 멀라고 헛돈을 쓰요?”
친구들에게 구례는 내 돈 주고 밥도 맘대로 못 먹는 곳이었다. 도시 것들아, 이게 바로 정이란 거란다, 팔은 안쪽으로 굽는 법, 구례사람이라 변명을 했더니 친구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정 싫어! 끈끈한 거 더 싫어!”
나도 그랬다. 끈끈한 정은 전근대적인 거라 여겼다. 질척거리는 그 마음이 불편했다. 언제 잘라내도 괜찮을 수 있도록, 가볍고 산뜻하게, 이게 서울 살던 시절 내 관계의 원칙이었다. 구례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는 그런 관계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 아는 게 아니다. 내 부모를 알고, 내 친구를 안다. 그런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는 무언가를 감출 수도 없다. 아버지가 주정뱅이였다든가, 엄마가 밤도망을 쳤다든가, 할머니 손버릇이 좋지 않아 남의 배추를 훔쳤다든가, 어린 시절 코흘리개였다든가, 꼴찌를 도맡아놓고 했다든가, 남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도 여기서는 만천하가 다 안다. 싫든 좋든 다 까발려진 상태에서 오늘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지만 나이 들어보니 알겠다. 내게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도망쳐도 좋은 산뜻한 인생은 없다는 것을. 좋든 싫든 내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현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뒷집 여자가 남편의 손찌검을 견디다 못해 밤도망을 쳤다고, 암만 맞고 살았기로서니 자식을 버리는 게 금수지 인간이냐고 수군거리다 말고 그 집 아이가 나타나면 밥은 묵었냐, 주섬주섬 먹을 것을 챙기는 마음이 정이다. 정은 모든 정황을 알면서도 인간으로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아니 외면해서는 아니 되는 마음의 발로다. 사람의 마음을 산뜻하다 못해 잔인하게 싹둑싹둑 잘라내는 일이 허다한 요즘 세상에,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내게 넘치는 것을 기꺼이 나누는 구례의 마음이 살짝 궁금하지 않은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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