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따위 용서를 하느니 천국을 포기하겠어[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3. 5. 26. 22: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박산호 옮김
은행나무 | 328쪽 | 1만7000원
종교 공동체 속 ‘집단 성폭행’
피해 여성들의 이틀간 토론을
소설로 담아낸 상상의 회의록

2005년부터 개신교 교파인 메노파 신자들이 일군 몰로치나 공동체 마을에 사는 거의 모든 소녀와 성인 여자가 강간당한다. 이들은 가짓과 식물 벨라도나로 만든 농장 동물용 마취제 스프레이를 맞고 의식을 잃었다. 다음날 온몸에서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종종 몸에서 피도 흘렸다. 범인이 공동체 남자 8명이라고 밝혀진 건 2009년이다. 2005~2009년 300명이 넘는 여자들이 침대에서 폭행당했다. 강간 뒤 임신한 피해자가 조산하면서 아기가 죽는 일도 벌어졌다.

전기도 없이 사는 이 자치 공동체 주교와 원로들은 범죄자들을 헛간에 몇십 년 동안 가둬놓으려 했지만, 피해자 가족들이 범죄자들을 공격하자 ‘신변 보호’를 위해 공동체 역사상 처음으로 경찰을 불러 넘긴다. 피해자는 안중에 없었다.

남성 성직자의 회유·압박 속
복수할 것인가, 끌려갈 것인가
‘용서’가 품은 모순을 폭로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강간 범죄를 두고 처음엔 “그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유령이나 악마가 내린 벌”이라고 믿는다. 범죄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도 ‘가해자 중심주의’가 이어졌다. 마을 원로들은 강간으로 임신한 여자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불청객이 남긴 산물”로 표현했다. 불청객은 성폭행 가해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피터스 주교는 한 피해자에게 “그런 짓을 한 건 악마고, 신이 죄를 저지른 여자들에게 벌을 주는 거”라고 말했다. 강간 폭행을 “여자의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했다. 원로들과 주교는 피해자들에게 ‘용서’도 강요한다. 남자들은 가해자 석방을 위한 보석금을 내러 도시로 떠나는데 그 이유도 “가해자들이 돌아오면, 몰로치나의 여자들에게는 이들을 용서할 기회”가 주어지고, “그래서 모두 다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교가 말했다. “만약 여자들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공동체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여자들은 그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 남자들이 돌아오려면 이틀의 시간이 남았다. 여자들은 1. 아무것도 하지 않기 2. 남아서 싸우기 3. 떠나기를 두고 투표한다. 여자들은 바깥세상을 하나도 모른다. 읽고 쓸 줄도 모른다. 공동체는 남자아이들에게만 글을 가르친다. 선택지 옆에 각각 ‘텅 빈 지평선’ ‘결투 모습’ ‘말 엉덩이’를 그렸다.

싸우기와 떠나기가 같은 득표수를 기록했다. 남아서 싸우기를 원하는 프리센가의 여자들과 떠나는 편을 선호하는 뢰벤가 여자 8명이 최종 선택을 하러 6월6일과 7일 건초 창고 다락에서 회의를 연다. 할머니부터 손녀까지 3대의 여자들은 모두 피해자이거나 그 가족이다.

여자들이 마을의 동물인지, 동물 같은 대우를 받았는지를 두고 이야기한다. “목소리 없는 여자들”이 소리를 냈다. “몰로치나의 동물들조차 제 보금자리에서 우리 여자들보다는 안전하게 살고 있어.”이들은 폭행이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 범죄를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고방식이 원로들과 주교가 만든 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또 권력의 결과다. “권력을 휘두를 대상이 필요했고 그게 우리가 된 거지.”

주제는 ‘용서와 복수’로 넘어간다.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 남자들을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하지 않고 공동체를 떠나는 건 파문당하는 것이고 “천국에 있는 우리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남아서 싸우면 남자들에게 질 것이고, 반항한 죄, 평화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깬 죄를 지으면서 더 무력한 존재가 돼 남자들에게 끝없이 복종하게 된다.

메노파 공동체 두 가문의 여자 8명은 성폭력을 저지른 범죄자들, 이들을 옹호하는 마을 남자들을 용서할지에 대해 토론한다. 마을에 남아 싸울지, 떠날지도 논의한다. 사진은 소설을 각색한 영화 <위민 토킹> 한 장면. 오리온 영화사

반론이 이어진다.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건 용서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 아닌가?”

분노도 터져 나온다. “여기 남아서 놈들의 심장을 다 총으로 쏴버리고 구덩이에 묻고 난 후에 도망치겠어. 꼭 그래야 한다면 신의 분노에 맞서겠어!”

싸운다면, 싸워 이긴다면? ‘여자들과 남자들이 모든 결정을 함께하기’ ‘여자들에게도 생각할 권리를 허용하기’ ‘소녀들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기’ 같은 삶의 조건을 적은 성명서를 먼저 내자는 의견이 나온다. “무엇을 파괴하기 위해 싸우느냐만이 아니라 무엇을 얻기 위해 싸우는지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떠난다면? 장점을 정리했다. “우리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우리는 남자들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을 것이다.” ‘평화’와 ‘신앙’을 위한 선택이다. “어떤 폭력이든 정당화될 수 없어. 몰로치나에서 계속 살면, 우리 여자들은 메노파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를 저버리게 돼. 평화주의라는 믿음 말이야. 여기 계속 있으면, 우리는 알면서도 폭력과 충돌하게 될 거야. 그게 우리가 저지른 폭력이건 아니면 우리가 당할 폭력이건 상관없이 말이야.”

싸우자는 이도 ‘신앙’을 들어 반대 의견을 낸다. “여기 남아서 싸우면, 우리 아이들을 위해 평화를 쟁취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결국엔 말이죠. 공동체는 손상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계속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로 남아 있게 될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메노파 신앙의 또 다른 핵심이잖아요.”

캐나다 작가 미리엄 테이브스의 2018년 작이다. 2005~2009년 볼리비아 메노파 공동체에서 일어난 실제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신념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여성들을 그린 소설을 두고 실제 사건에 대한 상상의 응답이라고 했다. 회의록을 통해 생존의 조건을 탐구하고, 가부장제와 권력 문제를 비판하며, 삶의 목적, 사랑과 연대를 역설한다.

어린 시절 메노파 공동체에서 자란 테이브스는 신앙 그중에서도 ‘용서’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최근 영국 인디펜던트지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용서는 종교적 구조이고, 스테이터스 쿠오(status quo, 현상 유지)를 이어가는 수단이다. 우리(메노파) 공동체에서는 용서가 전부다. 하지만 용서는 허락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