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인터넷이 나오면 왜 낯간지러운가[신새벽의 문체 탐구]
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문학동네 | 356쪽 | 1만5500원
세상에 두 개의 지면이 있다. 인터넷과 종이. 오늘날엔 물론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데, 그렇더라도 나는 업계인이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를 고찰하게 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타임라인, 인스타그램 피드에 인용되는 책이 아니라 그 반대가 궁금하다. 종이책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말들이 어떻게 실리는가?
이미상의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은 인터넷 이야기를 소설에 도입하는 최전선에 있다. 그 자신이 오래된 블로거라고 밝힌 이미상의 첫 번째 단편소설 ‘하긴’(2018)은 웹진 비유에 실렸고, 2019년 제10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에 올랐다. 소설집의 마지막 수록작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은 2022년 문학과사회에 실렸고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을 탔다.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소설은 여러 양식의 글을 품고 있다. 공개서한체의 일간지 칼럼, 동네서점의 투고란에 놓인 광기의 원고, 단편이 발표된 후 독자가 보낸 분노의 편지 등 다양한 텍스트가 등장한다. 그중 인터넷 게시글이 등장하는 표제작 ‘이중 작가 초롱’을 보자.
이름이 초롱인 작가가 있다. 초롱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자 그전에 쓴 습작품이 인터넷에 뿌려져 조리돌려진다. 소설이 ‘몰카’ 피해자의 고통을 가볍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초롱을 보이콧하는 ‘초롱조롱파인드닷컴’이 개설된다. 그런데 저자명이 초롱인 글이 문예지에서 기업 공모전까지 온갖 지면에 출몰하기 시작한다. 누가 초롱이고 어디까지가 초롱의 글일까. 사이트는 ‘초롱’의 글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이 된다.
잠깐, 이런 설정이 이해되는가? 초롱조롱파인드닷컴은 이용자에게 게시판 규칙을 부과한다. ‘초롱 조롱!’이라는 ‘주문’을 맨 앞에 쓰라는 게시글 양식이 있다. 예를 들어 “초롱 조롱! 초롱 조롱! 문사, 가자!”로 시작하는 256번 게시글은 문사 즉 문학과사회로 등단하고 싶다는 소원을 표현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을 느낀 문장이다.
“초롱 조롱! 초롱 조롱!”이라는 가상의 사이트의 주문은 왜 그처럼 낯간지러워 보일까? 종이에 인쇄되어서이기도 하고, 인터넷의 다중을 재현하는 어려움도 있다. 이것은 가상의 인터넷 언어를 창작할 때의 문제다. 가상의 소설 창작과는 다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초롱의 습작 ‘이모님의 불탄 스웨터’와 등단작 ‘테라바이트 안에서’는 그냥 소설 속 소설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평자들은 이미상 소설에서 인물 묘사보다 작가의 생각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서점 알라딘 이용자 ‘아라’는 “층층이 쌓아올린 상념의 어지러운 전개 앞에서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고 평했다. “작가의 선명한 이성이 독자의 지각까지 벼리는 글에는 수긍할 뿐이다”(ajw9111)라는 긍정도 있다. 이미상은 미투라는 주제에 사로잡혀 있다. 2018년 전후 한국에서 일어난 미투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중첩되는 사건을 연구한다. 다방면에서의 연구과정을 제시하는 방법이 소설 속 소설, 인터뷰, 인터넷 게시글 등의 차용이다. 여러 텍스트를 층층이, 어지럽게 엮는 문체다.
초롱은 문예창작반에서 파일을 유출했으리라는 의심으로 옛 문우들을 찾아간다. “죽이러 갔다가 악수하고 돌아오는” 버릇이 있는 초롱은 과연 유출범을 찾아내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이러 갔다가 악수하고 돌아온다’는 표현은 가해자를 끝장낼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 미투가 촉발한 사고실험이다. 몰카 피해자의 이야기를 함부로 다룬 가해자이자 그 습작이 유출당하고 조롱받은 피해자인 ‘이중 작가’ 초롱에게 이미상은 과제를 부여한다. 단죄도 용서도 아닌 “제3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소설에서도, 또 현실에서도 적을 죽이러 갔다가 그저 화해하고 돌아온 초롱은 이제 자기반성밖에 할 일이 없다. 결말에서 제3의 길을 찾는 임무는 독자에게 맡겨진다.
전승민 평론가는 이미상 덕분에 “혁명의 모든 주체가 문학장의 문제에 함께 연루된다”고 해제에 썼다. ‘함께’가 맞을까? 초롱조롱파인드닷컴은 인터넷과 문학장을 결합한 제3의 지면이다. 재미 추구가 지상 목표인 인터넷과 지면을 분배하는 문학장을 엮은 환상의 문학플랫폼. 이곳에서 강력한 유출 용의자인 ‘선생’은 초롱의 이름으로 글을 올리며 글쓰기 욕망을 해결한다.
“초롱 조롱!”이라는 주문이 어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롱을 조롱하는 자들이 왜 그 이름을 부르겠는가. 조롱, 조리돌림, 사이버불링으로 사람을 짓밟는 재미 욕구는 인정 욕구를 초과한다. 인터넷은 문학장보다 크다. 책이 부여하는 사회적 인정보다 스마트폰이 빨아들이는 관심의 총량이 더 크다. 그렇다면 인터넷 언어를 지면에 쓸 때 리얼리즘이 요구된다. 네이트판이 소설을, 트위터가 시를 이기는 시대의 작가에게 거장들의 문학에 더해 수많은 커뮤니티, SNS의 문법까지 익히자는 이야기가 되지만 말이다.
민음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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