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한의 민족’이라는 말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가수 피트 시거(1919~2014)가 1954년 영어 가사로 부른 아리랑이 유튜브에 남아 있다. 여러 나라의 민요 수집에 열성적이었던 이 가수는 우리네 할머니처럼 애잔하게 아리랑을 노래한다. 노래에 앞서 가수가 곡의 유래를 설명한다. 약 400년 전 조선 왕의 폭정에 억울하게 처형된 사람들이 죽기 전 한을 담아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며 불리기 시작한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비공식 국가(國歌)가 되었다는….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1941)에서 접한 얘기인 듯했다. 아리랑은 아마도 한(恨)이라는 정서를 한국 밖에 알린 원조 문화 콘텐츠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한의 민족’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한국이 ‘K-’로 시작하는 각종 타이틀을 자랑하게 된 이후 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최근 뜻밖의 계기에 그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영국의 문학상 부커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고래>(2004)의 작가 천명관이 부커 측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톡특한 정서인 한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세대가 다른 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고래>가 한국적 한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본 모양이다.
천명관은 ‘그 말을 알고 있다니 놀랍다’는 반응과 함께 한을 “한국인만의 고유 정서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이 남부의 목화밭에서 일하던 당시의 그 한을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들이 일제 때 겪었던 한보다 절대 가볍지 않다고 했다.
한이 국경을 넘는 보편적 정서일 수 있다는 얘기는 정말이지 현답이다. 작가가 말했듯 미국조차도, 그 안의 약자들은 한스럽게 살아왔다. 많은 사회에서 봉건 잔재가 사라졌다는 지금도, 심지어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에도 차별과 억압을 받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니 한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어느 시기든, 어느 ‘민족’ 안에서든 도처에 존재한다.
그런데 천명관이 덧붙인 말에는 이런 게 있다. <고래>에 나오는 여성들의 삶에 한의 요소가 있지만 동시에 “명랑하고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에너지들”도 넘쳐난다는 것이다. 억압받고 차별받는 존재들이 가진 힘은 그런 것이다. 한을 느껴본 사람들은 알 수 있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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