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서울’ 단골 작가들 구겐하임 덮친다

이한나 기자(azure@mk.co.kr) 2023. 5. 2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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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기획전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공동 주최
급속한 산업화와 유신시대 속에서
시대에 저항하는 퍼포먼스 기록 등
전위적 작가군 활동 재조명 작업
김구림, ‘구겐하임을 위한 현상에서 흔적으로’(2021), 종이에 연필, 29.7x42cm, 작가 소장
김구림, ‘1/24초의 의미’(1969), 16mm 필름, 컬러, 무음, 9분 14초, ed. 2_8,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소장 © 김구림, 사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제공
1970년 33세 청년 작가는 동료들과 함께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건물 전체를 염하듯 흰 광목천으로 두르는 ‘현상에서 흔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초상집 같다는 이유로 26시간 만에 철거당했다. 당시 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은 현장 사진 설명에서 이것도 ‘작품’이냐는 비아냥을 담아 ‘작가(?) 김구림’을 소개해 실험미술에 대한 당대 인식을 짐작하게 한다.

50여년 후 김구림(87)은 본인을 포함한 한국 실험미술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과 공동 기획으로 열린다는 소식에 종이에 연필로 ‘구겐하임을 위한 현상에서 흔적으로’(2021)를 구상했다. 미술관 앞에 땅을 파서 관을 묻고 장례 의식을 치러서 모든 관람객이 함께 호흡하고 즐기는 곳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로는 실현이 어려운 제안이지만 노 작가의 식지 않는 열정이 감탄스럽다.

국내 전위 예술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가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구겐하임과 공동 주최를 도모해 무려 7년 만의 결실이다. 오는 9월부터 뉴욕 구겐하임, 내년 2월부터 LA해머미술관으로 이어가는 대장정이 시작됐다.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회화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이에 반발해 반예술을 주창했던 청년작가연립전과 제4집단, 아방가르드협회, ST학회, 대구현대미술제 등 주요 단체 전시와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국제 미술계 활약을 연대순으로 추적해 오늘날 한국 현대예술의 원형을 탐구하고 초국가적 맥락도 살펴본다. 국내는 물론 구겐하임과 뉴욕현대미술관 등 해외 소장품까지 모아 주요 작가 29명의 작품 95점과 자료 30여점이 펼쳐졌다.

1968년 명동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반라의 정강자(1942~2017)에게 관람객들이 투명 풍선을 붙이고 터뜨리는 여성 주도적 퍼포먼스는 ‘기이하고 미친 짓’으로 조롱받는 등 이들은 일간지 사회면이나 대중잡지에 단골로 등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시 중 정강자의 ‘키스미’(1967)을 25일 취재진이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강소(80)의 작품 ‘소멸-화랑내 술집’(1973)은 명동화랑에 주점처럼 꾸며놓고 방문객들이 평범한 삶에서 덧없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끔 했다. 유신 치하에서 억눌렸던 청춘들은 세계 미술계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하며 자생적으로 예술활동을 발전시켰고, 해외 비엔날레 등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ST그룹 소속 이건용이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서 호평받았던 ‘신체항’도 이번에 재연됐다. 그는 ‘장소의 논리’와 ‘손의 논리’ 등 일상행위를 새롭게 사고하도록 하는 ‘이벤트-로지컬’ 작품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한 행위예술 대표작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실험미술 1960-1970년대’전시에서 이건용의 ‘손의 논리’(1975)가 전면에 선보였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시 중에서 이건용의 신체항을 강수정 학예연구관이 25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전시를 기획한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불확실한 시대 청년작가들의 창조적 용기를 전시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서구 작가들과 달리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좀 더 유연하게 작업을 연출하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설명했다.

안휘경 구겐하임 큐레이터도 “한국적 특수성에서 비롯됐지만, 세계적 맥락에서도 독창적인 작가들 작업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철조망으로 마포를 감싼 하종현(88)과 한국 무속에서 영감을 얻어 비조각을 펼친 이승택(91), 화생방 방독면과 배낭으로 군사통제 사회를 표현한 이태현(82) 등 일상 기물로 한국적 정체성을 추구한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이태현, ‘명1’, 1967(2001 재제작), 패널에 방독면, 배낭, 140 × 70 ×14cm 작가 소장 © 이태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성능경(79)은 신문에서 기사를 오려내고 남은 부분을 전시하고, 다음날 폐기하는 퍼포먼스와 함께 ‘세계전도’(1974)는 최신세계행정대지도에서 테두리만 남기고 지도를 300조각 내서 임의로 뒤섞어 배열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적으로 제안했다. 둘다 유신 헌법 체제에서 언론자유가 붕괴한 상황을 비판하는 성격이 강하다. 급속한 산업화와 억압적 정치체제 아래서도 일상에서 예술을 표현하고 대중과 적극 소통하려는 당당한 기개가 돋보인다.
성능경, ‘여기’(1975), 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 10.2×15.2cm(18), 작가소장 © 성능경, 사진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실험미술 1960-1970년대’전시에서 성능경의 ‘신문: 1979.6.1이후’(1974)가 설치된 모습.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성능경, ‘세계전도’(1974) 오브제 세계지도 166.5x212cm 136x196.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31일 학술세미나와 다음달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14일), 성능경의 ‘신문읽기’(21일),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28일) 등 대표적 퍼포먼스도 예정됐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이승택, ‘무제(새싹)’ (1963·2018 재제작) <구겐하임아부다비 소장, 사진제공= 갤러리현대>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한강변의 타살’(1968),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 퍼포먼스의 기록,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 황양자, 정강자 유족, 정무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김미경 컬렉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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