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요강·갑옷 … 조선 주름잡던 '한지'의 역사
한지는 '조선의 반도체'였다.
오늘날 한국이 생산하는 물건 중에 국제 정세와 가장 밀접한 품목을 꼽으라면 단연코 반도체일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생산부터 수출까지 모든 부분에서 국제 정세를 살피는 감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어땠을까.
이공계 출신으로 이후 과학사를 전공한 저자의 시각에서 오늘날 반도체 못지않게 중요했던 조선의 생산품은 단연코 한지다. 종이를 가장 먼저 만든 국가는 중국이지만 대나무 등으로 만들어 얇고 잘 찢어지는 다른 종이와 달리 튼튼한 한지는 1000년을 가는 내구성 덕에 오늘날에도 문화재 복원에 쓰일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닥나무를 활용해 만들고, 종이를 다듬이질하듯 두드리는 도침(搗砧) 기법까지 도입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그만큼 한지의 경제·사회적 중요도가 크다 보니 독특한 일도 벌어졌다. 한 번 사용하고 난 휴지(休紙)는 돌아온 종이를 뜻하는 환지(還紙)가 되어 신발, 삿갓뿐만 아니라 새색시가 타고 가는 가마 안의 요강으로 쓰이기도 했다. 심지어 면화를 키울 수 없었던 북방에서는 과거시험 낙방자들의 답안지인 낙폭지를 활용한 외투가 솜보다 낫다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군기감은 쇠사슬로 만든 갑옷보다 가볍고 방호 효과가 뛰어나다며 종이 갑옷을 제작했을 정도다.
한지는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체제를 유지하는 버팀목인 한편, 정치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불씨이기도 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중국에 보내는 물품으로 대중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다양한 간행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핵심적인 공납품이었으며 과거시험과 해외 시장 개척 등 다양한 사회 분야에서 변화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극복하며 역사를 써 나간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물을 토대로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 역시 생각의 빈칸을 채워준다.
종이가 조선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도 여러 물건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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