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에 10억원… 유럽·파키스탄에 팔린 초고가 프린터 정체는

나가노(일본)=최지희 기자 2023. 5. 2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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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무게만 3700㎏… 디지털 섬유 프린터
실크·폴리에스터에도 선명하게 인쇄
화학 물질·폐수 배출 줄여 친환경 패션 대안
이상봉 디자이너도 10억원 프린터로 패션쇼
지난 24일 일본 나가노현 시오지리시에 있는 세이코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 DTF(Direct To Fabric) 솔루션 센터에서 디지털 섬유 프린터가 작동하는 모습. 프린트 헤드가 64개 들어간 10억원짜리 프린터와 비교해 프린트 헤드가 8개로 적어 가격(3억원)도 더 저렴하다. /나가노=최지희 기자

프린터 한대에 10억원. 무게 3700㎏, 폭 4.6m·높이1.9m에 달하는 초대형·초고가 프린터가 전 세계 패션업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기계의 정체는 울, 실크, 레이온, 면, 폴리에스터 등 다양한 원단에 인쇄를 할 수 있는 디지털 섬유 프린터다. 이 프린터는 환경 오염 물질이 다량 배출되는 기존 의류 생산 방식을 바꿀 ‘게임 체인저’라는 평가를 받는다. 원단에 직접 인쇄를 해 원단 염색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 물질과 폐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일본 나가노현 시오지리시에 있는 세이코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에서 직접 마주한 이 프린터는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출력물이 나오는 롤러 두께만 해도 성인 손바닥 한 뼘이 넘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잉크 용량은 10리터에 달한다. 이 프린터에서 인쇄한 원단엔 형형색색 다양한 패턴이 선명하게 구현돼 있었다. 열을 쓰지 않고 기계적인 진동으로 잉크를 분사하는 잉크젯 방식을 사용해 정밀한 패턴을 도포하면서도 인쇄 속도를 높였다.

세이코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 DTF(Direct To Fabric) 솔루션 센터에 있는 10억원짜리 디지털 섬유 프린터. 천장 양옆에 걸린 천은 이 프린터에서 인쇄한 결과물이다. /나가노=최지희 기자

10억원짜리 프린터에는 인쇄 기술의 핵심인 길이 1.3㎝의 자그마한 프린트 헤드가 64개 들어간다. 프린트 헤드가 프린터에 많이 들어갈수록 더 빠르고 선명한 인쇄물을 출력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프린트 헤드가 적게 쓰이면 그만큼 프린터 가격이 내려간다. 같은 직물 전용 프린터이지만, 프린트 헤드가 8개 들어간 제품의 가격은 3억원으로 낮아진다.

현재까지 대당 10억원짜리 프린터는 옷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유럽과 파키스탄에 판매됐다. 반면 프린트 헤드가 적게 쓰여 보다 저렴한 버전의 직물 프린터는 세계 곳곳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선 직물 전문 회사인 성민기업 등이 이 프린터를 도입해 총 22대의 직물 프린터가 돌아가고 있다. 세이코 엡손 관계자는 “프린트 헤드가 64개 들어간 10억원짜리 직물 프린터는 고속 장비로, 프린팅 추세가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바뀌면서 고속 장비의 수요는 줄고 좀 더 저렴한 버전의 디지털 섬유 프린터 수요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패션 산업에서 디지털 섬유 인쇄 방식은 친환경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기존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옷을 만드는 데 여러 공정 단계를 거쳐 45~60일이 걸리는데, 디지털 방식을 활용하면 이 기간을 3~14일로 단축할 수 있다. 그만큼 물과 에너지 사용량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섬유에 색을 들이는 날염 과정과 샘플을 만들 때 나오는 많은 양의 폐수와 섬유 폐기물도 줄일 수 있다. 색을 입히는 잉크는 어린이 인체에도 안전한 친환경 안료 잉크를 사용해 한가지 잉크로도 다양한 원단에 인쇄할 수 있게끔 했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염료 잉크에 비해 물 사용량도 적다. 이런 친환경 기술을 인정받아 2023 대한민국 섬유소재 품질대상 섬유기계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이상봉 디자이너가 지난해 10월 2023 S/S 서울패션위크 패션쇼에서 세이코 엡손의 디지털 섬유 프린터를 사용해 만든 옷이 전시돼 있다. /엡손 코리아 제공

실제 국내외 여러 디자이너는 직물 프린터로 오염 물질이 덜 발생하는 디지털 인쇄 의류를 만들고 있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지난해 10월 2023 S/S 서울패션위크 패션쇼에서 세이코 엡손의 10억원짜리 프린터를 사용해 만든 60벌가량의 옷을 전시했다. 당시 이상봉 디자이너는 “한달 이상 소요되는 기존 날염 작업 시간을 일주일 이내로 줄여 탄소 배출량을 줄여준다”며 “빠르게 변하는 패션 트렌드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것도 디지털 프린팅 공정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어떤 디자인이라도 인쇄할 수 있어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전환을 꾀하는 패션 기업에서도 디지털 프린팅 도입을 늘리고 있다.

섬유를 프린터로 인쇄하는 데에서 나아가 세이코 엡손은 의류 폐기물을 프린터에서 새 원단으로 재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활용되고 있는 세이코 엡손 고유의 드라이 섬유 기술은 폐지를 프린터에 넣어 섬유로 분쇄한 뒤,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 깨끗한 종이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 기술을 발전시켜 앞으로는 종이뿐 아니라 원단도 프린터를 통해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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