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압박에 소신까지 내팽개친 네타냐후…이스라엘 예산안 처리 후폭풍

손우성 기자 2023. 5. 26. 15: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평소 비판했던 종교 예산 무더기 통과
강성 유대·반아랍 극우 정당 도움 절실
야권 반발 사법개편 재추진 뜻도 내비쳐
베냐민 네타냐후(왼쪽) 이스라엘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예루살렘 크네세트(의회)에서 열린 예산안 심의 회의에 참석해 오른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AFP연합뉴스

대표적인 보수 인사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더 색채가 강한 우파 세력의 득세로 운신 폭이 좁아지는 모양새다. 극우 강경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역학 관계 속에서 네타냐후 총리는 오랜 소신을 깨 가면서까지 예산안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어 논란이 됐던 사법개편을 다시 시도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인기 없는 지도자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5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는 전날 9980억셰켈(약 354조25000억원) 규모의 2023~2024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120명 의원 가운데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우파 연합 64명이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는 56표였다.

야권과 시민단체에선 예산안이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편향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네타냐후 총리는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강성 유대 정당과 반아랍 극우 정당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137억셰켈(4조8600억원)을 판공비 예산으로 배정했다.

우선 토라유대주의연합(UTJ)의 요구로 배정된 37억셰켈(1조3100억원)은 초정통파 유대 학교(예시바) 학생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이들은 병역 의무를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금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리는 탓에 야권에선 개혁 대상 1순위로 꼽는다. 여기에 12억셰켈(4257억원)은 수학과 과학, 영어 등 진학과 취업에 필요한 수업을 하지 않는 사립 유대 학교 지원 용도로 배정됐다.

네타냐후 총리 내각의 ‘트러블메이커’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이 대표로 있는 오츠마 예후디트(이스라엘의 힘)가 요구한 갈릴리·네게브 지역 개발 비용도 포함됐다. 외신에선 이 예산이 국제법상 불법인 요르단강 서안지구 정착촌 확대에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스라엘 예비군들이 25일(현지시간)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개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이번 예산안은 평소 네타냐후 총리가 강조했던 가치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수십 년간 네타냐후 총리는 자유 시장 교리의 옹호자였다”며 “복지 수당을 삭감하고, 정부 지출을 억제하고, 민영화를 가속하는 정책을 펴왔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난해 자서전에서도 종교 공부를 이유로 취업을 피하는 보수적인 유대인으로부터 이스라엘 경제를 어떻게 구해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며 “그러나 이번에 통과된 예산안은 그 모든 유산을 뒤집어 놓았다”고 꼬집었다.

이에 네타냐후 총리가 극우 세력 없이 독자 통치가 불가능한 한계에 직면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스라엘은 5월 말까지 크네세트에서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자동으로 내각이 해산되는 규정이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네타냐후 총리는 5%가 넘는 인플레이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 국면에서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며 “지금 당장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진다면 그가 속한 우파 연합은 10석을 잃고 크네세트 과반을 잃게 된다는 여론조사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극우 연정의 예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네타냐후 총리가 실각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베냐민 네타냐후(왼쪽)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 24일(현지시간) 예루살렘 크네세트(의회)에서 열린 예산안 심의에 앞서 극우 정치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더 나아가 네타냐후 총리는 사법개편 입법도 다시 시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예산안 처리 이후 “우리는 이미 (사법개편을) 재추진하고 있다”며 “야당과의 협상에서 합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가 추진하는 사법개편은 대법원 판결을 의회 과반으로 무력화하고, 정부와 여당이 추천하는 인사가 법관선정위원회 다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또한 네타냐후 총리의 불안한 입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외신들은 지적한다. NYT는 “사법개편은 이스라엘 초정통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세속 이스라엘인은 사법부 보호를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며 “네타냐후 총리는 정치적·경제적 편의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