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꼭 올려야 하나요?[뉴스레터 점선면]
※뉴스레터 점선면 5월24일자(https://stib.ee/vli7)에 게재된 글입니다. 경향신문 대표 뉴스레터 점선면은 이슈와 기사를 엄선해 입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점선면을 구독해 더 많은 뉴스레터를 메일함으로 받아보시려면 여기(https://url.kr/7vzi4n)로 접속해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세요.
오늘 점선면에서는 전기요금 인상과 한전의 적자난을 다룹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동기는 사실 좀 개인적인데요. 2분기 요금 인상 이후 에어컨 앞에서 새삼 망설이게 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의 전기요금이 에너지 무기화·연료비 인상 등 현실적인 문제를 회피하며 지나치게 저렴하게 책정돼 있다는 건, 지난 점선면 <‘난방빚’ 갚는 데 몇 년이 걸릴까?>에서 다루기도 했던 터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내 지갑에 타격이 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또 싱숭생숭하더라고요. 한전 누적 적자가 천문학적 수준이라는데, 내로라하는 전문가분들 모두 전기요금 현실화가 답이라고 하는데, 왠지 이대로 수긍하기는 싫었습니다.
한번은 내 힘으로 이 문제를 요리조리 뜯어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어요.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고 이 문제를 풀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한전이 뭘 잘못해서 이 사달이 난 게 아닐까? 어차피 전기는 기업들이 다 쓰는 거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에어컨은 본격적인 여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전기요금 현실화가 답”이라는 박상영 산업부 기자와 함께 준비했어요.
1. 이번엔 냉방비 대란?
· 전기요금이 1분기에 이어 또다시 인상되면서 올여름 ‘냉방비 대란’이 벌어질 거란 우려가 나옵니다. 지난여름 이후 누적된 전기요금 인상 폭이 에어컨 가동과 함께 한꺼번에 체감될 것으로 예상되거든요.
· 전기요금 인상은 지난해부터 거듭됐어요. 지난해 초와 비교하면 kWh당 총 40.4원이 오른 셈인데요. 평균 소비량인 월 332kWh의 전기를 사용하는 4인 가구의 경우 지난해 초보다 1만5250원의 요금을 더 내게 됐어요.
2. 이게 다 한전 때문?
· 전기요금을 올린 이유는 한국전력공사의 적자난 때문입니다. 2021년부터 지난 1분기까지 한전의 누적 적자가 44조7000억원이 넘어요.
· 여당은 전기요금 인상에 앞서 한전의 ‘경영 실패’에 책임을 물었어요. 사장 퇴진을 압박했고, 자구안 마련을 촉구했죠.
· 이에 한전은 25조원 규모의 비용 절감안을 발표했습니다. 임직원의 임금 인상분을 반납하고 보유 부동산을 매각하겠다고 했어요. 정승일 사장은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고 한전은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어요.
· 그런데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자를 해소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여요. 한전의 영업손실 규모가 급격히 커진 것은 연료비와 전력 구입비의 급증 때문이거든요.
· 앞서 정부는 올해 전기요금이 kWh당 51.6원 이상 올라야 한전의 경영이 정상화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1·2분기 합쳐 21.1원을 올리는 데 그쳤어요.
잇따른 전기요금 인상과 임금 인상분 반납 등 자구안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한전 누적 적자는 해소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1. 한전 “제가 뭘 할 수 있는데요?”
탄탄한 재무구조로 ‘알짜 공기업’ ‘신이 내린 직장’으로 불리던 한국전력공사가 어쩌다 이런 적자난에 빠진 걸까요? 이유는 자명해요. 전기를 만드는 천연가스·석탄 등 연료비 가격은 폭등했는데, 전기요금은 거의 올리지 못한 탓이죠.
한전은 발전사에서 전기를 사다 가정이나 기업에 파는 회사입니다. 보통의 소매기업은 도매가격에 마진을 붙여 판매가격을 정하지만, 한전은 도매가(올해 1분기 기준, kWh당 174원)보다도 낮은 판매가(146.6원)에 전기를 팔고 있어요.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역마진’ 구조에서는 적자가 불어나는 게 당연합니다.
역마진 구조는 한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력의 도매가도 판매가도 한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거든요. 도매가는 액화천연가스(LNG) 등 연료의 국제 가격에 달려있고, 소매가 즉 전기요금은 산업부·기획재정부·여당 등이 협의를 통해 정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해이의 늪에 빠진 채 요금을 안 올려주면 다 같이 죽는다는 식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여론몰이만 한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한전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촉구하며 이렇게 비판합니다.
한전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국민을 겁박’한다기엔 한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도매가 이하로 전기를 ‘퍼주는’ 역마진 구조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2. 산업용 전기 “나만 특혜 받는다고?”
한전이 할 수 있는 일이 왜 이렇게 없을까요? 전기요금이 ‘정치요금’이 됐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번 요금 인상의 주도권을 쥔 것도 산업부가 아닌 여당인 국민의힘이었습니다. 여권이 ‘제2의 난방비 사태’를 피하기 위해 요금 인상을 억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와요. 전기요금을 심의·의결하는 기구인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는 유명무실하고요.
전기요금은 정부가 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거예요. ‘전기세’라는 말이 보여주듯 우리나라에서는 ‘전기=공공재’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전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필수재’일 뿐, 국가가 반드시 가격을 결정하고 공급을 도맡아야 하는 ‘공공재’는 아니에요. 국방·공교육·치안 등과 달리 원료의 양이 한정돼 소비 과정에서 배제와 경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 정부는 수출주도 경제 성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산업용 전기를 저렴하게 제공했어요. 세계 시장의 ‘배제와 경쟁’에서 국내 기업들에게 우위를 주기 위해서였죠. 그런 이유로 지금의 한전 위기 앞에서도 ‘산업용 전기 요금만 올리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미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에게 정부가 계속 혜택을 줄 이유는 없으니까요.
맞아요. 그런 이유로 산업용 전기 요금은 이미 많이 올랐습니다. 2007년만 해도 산업용 요금은 가정용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주택용 전기 요금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에요. 지난해 10월에는 산업용 요금을 주택용보다 2배 이상 올리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죠. 산업용 전기‘만’ 너무 싼 것이 문제라는 건 그래서 현실과 맞지 않아요.
진짜 문제는 산업용이든 주택용이든 모든 용도의 전기 요금이 급격히 치솟은 생산단가에 비해 지나치게 싸다는 겁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전기 대부분이 가격 변동성이 큰 수입 연료에 기대고 있는데 판매 가격은 이런 상황과 아무런 관계 없는 정치 논리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때 정치적 논리란 ‘전기료 인상=표 떨어진다’는 판단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2021년 연료비 변동분을 전기요금에 반영하자는 ‘연료비 연동제’가 도입됐지만, 결국은 인상분을 정부가 ‘판단’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된 적은 없어요. 덕분에 우리는 전기를 만드는 연료가 귀해졌다는 ‘시장의 신호’를 듣지 못하고 있고요.
지난번 점선면에서도 ‘우리도 모르게 난방빚을 쌓고 있다’고 말씀 드렸었죠. ‘전기빚’ 역시 쌓이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전기요금 현실화’를 입모아 말하고 있는 이유예요.
3. LNG “언제까지 나한테 의존할 거야?”
앞서 한전이 전기를 ‘비싸게 팔 수 없는 이유’를 들여다봤다면, 지금부터는 ‘싸게 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국내에서 자급할 수 있었다면, 한전의 적자난은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상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가장 강력한 요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의 폭등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LNG 발전으로만 전기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한국전력통계에 따르면 2021년 국내 전력 발전량의 27.4%가 원자력, 34.3%는 석탄으로 만들어졌어요. 전체 에너지원 중 천연가스의 비중은 29.2%고요. 신재생에너지는 7.5%에 그쳤습니다.
LNG 말고도 대안은 있는 거예요.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듭니다.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문제라면, 화석연료 대신 국내에서 수급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만든 전기를 더 많이 사다 팔면 되잖아요? 가격이 언제 오를지 모르는 LNG 에너지 대신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토종 에너지’, 즉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유통한다면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한전의 역마진 구조가 해결되지 않을까요?
전문가들도 비슷한 제안을 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가스와 석유 등 화석연료 가격 변동의 영향을 덜 받도록 전력 생산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짤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요.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무역적자의 확대도 줄일 수 있잖아요.
김승완 충남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선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있지만, 단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운 원전보다 태양광과 풍력의 비중을 지금보다 높여야 이런 일에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장기적 관점’에서의 제안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만으로는 당장의 전력수요를 모두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한전은 비싸도 어쩔 수 없이 LNG 등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4. 탈원전 정책 “저는 억울해요”
‘그러게 원전이나 재생에너지 진작 안 늘리고 여태 뭐 한거야?’ 혹 이런 생각하신 분 계신가요? 정부와 여당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한전의 적자 원인으로 지목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원전 이용률과 비중이 높아질수록 한전 적자가 낮아진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한전 수익률과 원자력발전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국회 입법조사처의 분석이 있어요.
박영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전력거래소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봐도 비슷한 결론이 나옵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영구 정지된 월성 1호기를 올해 최대 출력으로 쉬지 않고 가동했더라도 전력도매가격을 불과 1.51원을 낮추는 데 그쳤을 것이라는 거예요. 한전 적자를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원자력발전은 화석 연료의 가격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토종 에너지’인데다 생산 단가도 저렴한 편입니다. 그런 원전을 영구 정지 시켰는데도 전력도매가격에 미친 영향이 이토록 미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전이 지불하는 전력도매가격은 원전이 아닌 가장 비싼 연료원인 LNG 발전 가격에 주로 좌우되기 때문이에요. 전력거래소는 전력을 공급할 때 가격이 가장 싼 발전기부터 차례대로 투입하는데 전력도매가는 가장 마지막으로 투입되는 비싼 LNG 발전 가격에 따라 결정되거든요. (📌전력도매가격을 결정하는 SMP 제도 때문인데,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이 글(https://url.kr/asx9jh)을 참고해주세요)
만약 LNG 발전이 거의 투입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양의 전기가 원전에서 생산됐다면 전력도매가가 크게 내려갔겠지만, ‘탈원전 정책’ 전후의 원전 이용률이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 건 아니거든요.
전혀 다른 결론을 낸 보고서도 있어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는 5월22일 ‘탈원전 비용 추정 결과’ 보고서를 통해 “2002년의 경우 탈원전이 없었다면, 한전 적자는 32조원이 아니라 약 10조가 감소한 22조원 수준으로 추정될 수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전력도매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발전원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만큼 ‘토종 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엔 ‘선택’이 필요해요. 대표적인 토종 에너지로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있지만, 두 발전원을 함께 늘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원전이나 재생에너지 모두 실시간 발전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경직성 발전원’이기 때문에, 한쪽이 늘면 다른 한쪽을 줄여야 하거든요.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명백해 보입니다. ‘원전만능주의’에 가깝죠. 정부는 최근 확정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발전원별 비중을 원전 32.4%, 가스 22.9%, 신재생에너지 21.6%, 석탄 19.7%로 잡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목표치와 비교하면 원전 비중은 대폭 늘리고, 신재생 비중은 크게 줄인 거예요.
원전이 재생에너지에 비해 저렴한 발전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의 분석에 따르면 2025년 원자력 발전단가는 태양광·육상풍력과 거의 비슷하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해요. 국가별 편차는 크지만 단지 경제성만으로 원전을 택할 때는 지났다고 볼 수 있어요.
미국과 유럽연합 등은 자국 내에 재생에너지 생산기반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산업정책을 펴고 있어요. 2050년까지 필요 전력 전량을 재생에너지로 구매하자는 기업들의 캠페인 RE100의 이행요구도 세계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5. 국민 “한전이 좀 참아주면 안 될까?”
날이 점점 더 더워지고 있어요. 한전의 적자 누적으로 전기요금이 올랐고, 또 오를 수 있다는 소식에 여름을 앞둔 자영업자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고 해요. 아무리 ‘소폭 인상’이래도 서민 가계에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죠.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모든 국민이 쓰는 전기인데, 요금을 올리는 대신 공기업인 한전이 적자 부담을 계속 질 수는 없는 걸까요? 한 독자님께서는 “생활 필수재인 전기요금이 올라가면 저소득층부터 타격을 받게 되어 사회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면서 “한전의 재정 적자는 ‘사회 안정성 비용’이라 생각한다”고도 말씀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문장이에요.
하지만 한전은 공기업인 동시에 상장회사이기 때문에 무한정 빚을 낼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박상영 기자는 “지금과 같은 문제가 지속되면 완전한 국유화 혹은 민영화의 기로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데, 한전의 현재 적자 폭을 고려할 때 막대한 국민 혈세가 투입되는 국유화는 현실적으로 어려워보인다”면서 “오히려 파괴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의 민영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최악의 경우 블랙아웃, 즉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전력구매대금 지급이 어려워지면 한전의 전기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적자로 인해 인프라 투자가 지지부진해지면 송배전망 낙후로 전력수요관리에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전력망 확대·개발·연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지적도 나오고요.
한전이 발행한 대규모 채권이 채권시장의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현상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큽니다. 한전은 자금 사정이 나빠지면서 발전사에 지불할 전력구매대금을 채권시장에서 조달하고 있는데요. 올해 들어 발행한 ‘한전채’만 8조원이 넘습니다.
한전채는 국가가 손실을 보전해 줄 것이란 이유로 신용등급이 높은데요. 이 한전채로 채권시장의 자금이 쏠리면서 대기업마저 채권 발행이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어요. 이를 ‘한전채의 회사채 구축효과’라고 부릅니다.
한전의 적자 누적은 경영 실패의 결과라기 보단, 전기를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역마진’ 구조 때문입니다.
낮은 에너지 자급률과 전기요금의 ‘정치요금화’ 등의 문제 때문에 한전은 스스로 역마진 구조를 헤쳐나올 방법이 없어요.
그렇다고 적자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사회 전체에 미치는 해악이 무척 크거든요.
1. 전기요금과 정치요금 사이
앞서 에너지 자급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했지만 사실 한전 적자 누적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역시 ‘전기요금 현실화’입니다. 에너지 자급 문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풀어가더라도, 전기요금을 시장 현실에 맞게 인상하는 것이 한전의 적자 해소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기 때문이죠. 한전이 공기업인 동시에 상장기업이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박상영 기자는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 금리를 정하는 것처럼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전기요금을 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장의 표를 의식한 정치 논리가 아닌,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반영한 가격으로 전기요금이 결정돼야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전기 공급과 소비가 가능하다는 거죠.
다만 전기요금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있어야 할 겁니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도 “앞으로 객관성과 전문성을 갖춘 전기요금 결정체계를 만들어보자는 차원에서 전문가와 에너지업계, 국민, 나아가 정치권 의견까지 포함해 수렴하겠다”고 말했죠.
전기요금이 정말 ‘정치요금’이라면, 누구를 위해 요금을 얼마나 어떻게 올리고 낮출 것인지 논하는 민주적 공론장을 갖춰야 합니다. 예컨대 산업용 전기 요금을 주택용보다 우선 인상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을 정치권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 주체들이 검토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전기사용량은 ‘세계 3위’ 수준입니다. 기업이 쓰는 전기량이 워낙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삼성전자가 사용한 전력량은 같은 기간 1500만 가구가 사용한 전력량의 4분의 1에 달했습니다. 2021년 20대 기업은 국민 전체가 쓰는 전기량 보다 10%를 더 썼고요.
그런데 전력 사용량이 많은 기업일수록 요금 혜택은 늘어나요. 세간의 오해처럼 산업용 요금이 주택용보다 훨씬 싸서가 아니라,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고 심야 시간에 적용되는 ‘경부하 요금’의 혜택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혜택이 기업의 에너지 효율화를 방해하고 낭비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어요.
이같은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인지 등에 관해 더 많은 국민이 알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리길 바라요. 다양한 주체들이 요금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시간이에요.
2. 에너지 공공성에 관한 세 가지 관점
결국 한전의 적자 때문이든, 지속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서든 전력산업의 구조적 개편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전기요금, 앞으로는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요? ‘미리보는 점선면’에서 이런 질문을 드렸었죠. 세 가지 보기를 제안드렸어요.
- 원가가 오르면 요금도 올라야지! 시장에서 공정하게 정해야
- 전기는 모두가 누려야 할 필수재! 국가가 값싸게 공급해야
- 꼭 국가가 나설 필요는 없어! 각 지역 공동체가 알아서 정해야
실은 홍덕화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가 구분한 ‘한국 사회의 에너지 전환 운동 방향’ 세 가지를 토대로 작성해본 답지였는데요.
전력시장 민영화와 함께 친환경·저탄소 에너지시스템으로의 전환의 문제를 함께 살펴본 배문규 기자의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독자님은 세 가지 운동 방향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 기사를 통해 확인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세 운동 방향의 논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 ‘시장활용론’은 공정한 시장경쟁을 에너지 전환의 지름길로 봅니다. 연료비의 등락이 전기요금에 반영돼야 하며 한전 독점체제가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해요. 현재 전력시장은 화석원료와 원전에 맞게 설계돼 있어 재생에너지가 생산단가에 비해 비싸게 거래되는 경향이 있거든요. 시장 참여자가 다양해지면 재생에너지에 맞는 거래 시스템도 자리를 잡을 거라고 전망해요.
② 반면 ‘에너지 사회공공성론’은 부분적으로 민영화된 전력산업을 재공공화하고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력시장을 개편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위해 시장을 민간에 개방하면 전기요금이 올라 서민 부담이 커질 것이라 우려하거든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서는 시장보다는 공공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지역화·공유화론’은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협동조합 등을 통해 에너지 정책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중앙 중심 에너지 정책 때문에 지역 생태계가 파괴되는 일을 막자는 겁니다. 지금도 수도권에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지방 농촌은 태양광 발전소와 송전탑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거든요. 에너지 생산과 소비 공간을 일치시키는 지역별 소규모 분산 에너지 시스템이 대안으로 거론돼요.
독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처럼 저렴한 전기요금이 결국 에너지 소비를 부추기고 기후위기를 가속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전기요금 인상이 에너지 불평등만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보시나요? 혹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어떤 의견이든 좋으니 점선면팀에 들려주세요 😊
전기요금이 정말 ‘정치요금’이라면 전기요금을 얼마나,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민주적으로 논하는 정치적 공론장이 있어야 합니다. 에너지 전환 운동의 세 가지 방향을 참고 삼아 전기요금 현실화의 방법을 고민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세 줄 점선면
▶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 누적으로 전기요금이 또다시 인상됐다.
▶ 적자 누적의 원인은 경영 실패보다는 전력시장의 ‘역마진’ 구조에 있다.
▶ 전기요금 현실화와 함께 전력산업의 구조 개편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에 첨부된 링크와 추천 기사를 보시려면 뉴스레터 점선면 원본(https://stib.ee/vli7)을 확인해주세요. 매주 화~금요일 오전 7시 메일함으로 보내드리는 점선면을 구독하시려면 여기(https://url.kr/7vzi4n)에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세요.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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