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틈’을 만들어 노는 너희들 [책&생각]

한겨레 2023. 5. 2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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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을 펼칠 때와 그림책을 펼칠 때의 마음이 다르다.

동화를 읽을 때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그림책을 볼 때는 '장면'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을 펼쳤을 때 어쩌면 글이 필요 없는 책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른 바닥에 균열을 내며 솟아나는 풀, 맨홀 뚜껑 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풀, 길가에 전봇대 아래에 '틈만 나면' 자라는 풀 그림은 그 자체로 생명력에 대한 선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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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틈이 나면
이순옥 글·그림 l 길벗어린이(2023)

동화책을 펼칠 때와 그림책을 펼칠 때의 마음이 다르다. 동화를 읽을 때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그림책을 볼 때는 ‘장면’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작가가 어디를 보면서 걸었는지, 독자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글보다 직접 말해준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는지, 까치를 보았는지, 개미나 지렁이를 보았는지 나도 알게 되는 게 즐겁다. 표현 방식도 중요하다. 왜 이걸 빨간색으로 칠했을까, 여기는 왜 비워 두었을까, 왜 연필로 그렸을까 생각하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글을 잊는다. 솔직히 글은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길 때도 있다.

<틈만 나면>을 펼쳤을 때 어쩌면 글이 필요 없는 책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른 바닥에 균열을 내며 솟아나는 풀, 맨홀 뚜껑 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풀, 길가에 전봇대 아래에 ‘틈만 나면’ 자라는 풀 그림은 그 자체로 생명력에 대한 선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풀들이 스스로 틈을 만들어서 자신을 키운다는 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한편으로 ‘잡초의 힘’은 보편적인 주제다. 흔한 풍경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그림책을 완성하는 것은 글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은 그림에 한 문장, 심지어 한 구절 놓인 글이 장면마다 풍성한 서사를 만들어 낸다. 하수구처럼 “멋진 곳이 아니어도” 철망에 갇혀 “조금 답답해도” 아주 조그마한 물웅덩이를 품고 “꿈을 꿀 수 있”는 풀들이 저마다 역동적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그림책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었다. 종이에 제목과 작가 이름을 적고 두 줄을 띄운 다음, 장면이 바뀔 때마다 줄을 바꾸어가며 전체 글을 옮겨 적어보았다. 글만 보고도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짐작했던 대로 한 편의 시(詩)이기도 했다. 시일 때 글 속의 ‘나’는 풀이 아닌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틈만 나면/ 작은 틈만 나면/ 나는 태어날 거야.” “주인공이 아니면 어때.” “나만의 춤을 출 수 있다면.” ‘나’를 어린이로 떠올리고 읽어도 여전히 진실을 담은 문장이다.

풀뿐 아니라 작가도 틈을 찾았다. 허름한 골목 담장의 틈, 벤치 나무판의 틈, 아무도 생명을 기대하지 않을 것 같은 아스팔트 도로의 틈을 찾았다. 작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락 말락 하는 작은 꽃을 보면서 조마조마해하고, 씩씩하게 담장을 넘는 넝쿨을 응원하면서 그걸 어린이에게 보여주려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작고 여리지만 힘있게 살아 있는 ‘우리’를 보여주려고.

먹먹한 마음으로 책을 어루만지는데 바깥에서 노는 어린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나 학원 끝났어! 야, 나 화장실 갔다 올 거니까 너희 다 놀고 있어!” 하고 외치자 또 누군가가 “야, 야, 빨리 와! 나 엄마가 오래. 시간 없어!” 하고 답했다. 기어코 틈을 만들어서 노는 어린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오월이다.

김소영 독서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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