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강가에서 책방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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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을 자주 걷는다.
꽃이 진 후 쑥쑥 자라 열매까지 맺은 가을 섬진강을 걸으면서, 비로소 관광객의 눈이 아니라 그곳에 정착해 사는 이들의 눈으로 강을 볼 수 있었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에 닿는 골짜기 가운데 가장 깊고 험한 곳이 어디인가를 의논했던 적이 있다.
섬진강을 따라 책방들이 고을마다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동의 벗들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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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근처 피아골 답사 이어
‘청년정담 책다방’ 방문할 목적
하동서 세계차엑스포와 맞춰
행사장에 만든 독서·다도 공간
책장 훑어도 차향 묻어나는듯
섬진강을 자주 걷는다. 개들을 데리고 두세 시간 강으로 나간다. 강을 걷는 방법은 간단하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구례 쪽으로 내려가면 침실습지에 닿고, 강물을 거슬러 순창 쪽으로 올라가면 제월섬에 이른다.
2년 전 가을, 곡성에서 구례를 거쳐 하동 화개장터까지 작정하고 걸었던 적이 있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나무와 바위를 발견하면 곁에서 쉬었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과수원에서 감을 사 먹었고, 농부들과 뜻하지 않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바람에 사흘이나 걸렸다. 섬진강 들녘에 정착하기 전엔 주로 봄에만 자동차로 오갔기에, 이 길에 대한 추억은 벚꽃밖에 없었다. 꽃이 진 후 쑥쑥 자라 열매까지 맺은 가을 섬진강을 걸으면서, 비로소 관광객의 눈이 아니라 그곳에 정착해 사는 이들의 눈으로 강을 볼 수 있었다.
늦봄 강변도로를 따라 곡성에서 하동까지 내려갔다. 걷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농번기의 부산함이 사나흘의 만유(漫遊)도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에 수확할 열매들을 떠올리며, 지금은 모판을 살피고 밭에 김을 맬 때다. 하루 이틀 게으름을 부리다간 일년 농사를 망치고 만다. 그래도 반나절 넘게 강을 따르기로 한 것은 두 군데를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먼저 피아골로 갔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에 닿는 골짜기 가운데 가장 깊고 험한 곳이 어디인가를 의논했던 적이 있다. 대부분 피아골을 꼽았다. 골짜기에 관한 글을 구상하자마자 피아골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구례구역을 지나 달리다가 연곡천을 향해 왼편으로 꺾었다. 연곡사를 통과한 다음에도 골짜기의 참맛을 알려면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다.
압도적인 것은 계곡의 물소리였다. 봄 가뭄으로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몇몇 도시들의 물 걱정이 깊었다. 곡신불사(谷神不死),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람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나무와 풀들이 저마다 신록을 뽐내고 있었다.
화개장터 이전까지는 강물이 급히 흐르며 물줄기도 더러 꺾였지만, 하동읍 가까이 이르자 큰 강 하류답게 강폭은 넓어지고 강물은 고요하며 군데군데 모래사장이 눈에 띄었다. 하동문화예술회관 2층 복도에 마련된 ‘청년청담 책다방’이 최종 목적지였다. 하동의 지인들로부터 이미 여러번 차 선물을 받았고, 차에 관한 신기한 일화와 속 깊은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세계차엑스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에 정성을 다하는 하동과 잘 어울리는 행사라고 생각했다.
더욱 반가운 소식은 행사장에 책다방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차와 책은 단짝이었다.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떠오른 생각을 정돈하고, 또렷해진 고민을 독서하며 풀어나간 예는 숱하게 많다. ‘청년청담 책다방’에 선별된 책들 역시 책과 차의 탁월한 어울림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차를 다룬 책들을 손끝으로 훑기만 해도 차향이 났고, 하동에 살며 섬진강과 지리산을 밥 먹듯이 오간 작가들의 작품집은 덤이었다. 이 책들을 읽은 후 하동의 차밭을 찾는다면, 눈은 더 높고 손은 더 다정할 것이다.
강을 닮아 굽이굽이 긴 책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맑은 차와 소박한 잔이 눈과 코와 혀와 배를 편안하고 즐겁게 했다. 섬진강을 따라 책방들이 고을마다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동의 벗들과 나눴다. 인구소멸지역과 책방소멸지역은 함께 논의해 극복할 과제인 것이다.
곡성에서 생태책방을 연 지도 1년 반이 지났다. 어려운 점이 여전히 많지만, 첫해와는 다른 꿈도 생겼다.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면 강이 키워주리라는 믿음을 하동에서도 차를 마시며 확인했다. 다음에는 순창이나 임실로도 책과 차의 인연을 찾아 올라가야겠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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