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인어공주가 꿈꾼 새 세상
다섯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엄마 손에 이끌려 백화점을 돌다 지쳐 떼를 쓰던 내게 음악 CD 한 장이 손에 들어왔다. 조잡한 연두색 배경에 빨간 머리 인어공주 인형 사진을 찍어 붙인 ‘디즈니 주제가 모음’이었다. 20세기 디즈니 명곡을 알차게 수록한 앨범이었다.
아무리 명곡이어도, 어린아이가 한자리에 앉아 스무 곡 이상을 집중해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아도 졸음이 쏟아졌고, 매번 10번째 곡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그 10번째 순서의 노래가 바로 주인공 에리얼이 육지를 상상하며 부른 ‘파트 오브 유어 월드’였다. 작곡가 앨런 멩컨과 성우 조디 벤슨이 완성한 이 노래는 애니메이션 영화 ‘인어공주’를 상징하는 곡이자 디즈니의 침체기를 끝내고 1990년대 르네상스를 예고한 명곡이었다.
이후 나는 수많은 목소리의 ‘파트 오브 유어 월드’를 들으며 자랐다. 배우 이유비와 조수민, 가수 소향, 걸그룹 모모랜드의 낸시와 여자친구의 은하를 거쳐 최근 화제인 걸그룹 뉴진스 멤버 다니엘의 ‘저곳으로’까지. 많은 이들이 이 세이렌의 노래를 불렀다. 일본계 미국인 다이애나 휴이와 하와이 출신 아울리이 크러발리오도 뮤지컬 무대에서 인어공주 에리얼로 분했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 만큼은,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어공주였다.
최근 논란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를 봤다. 본래 백인으로 표현됐던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해 4년 전부터 말이 많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오히려 폭풍 속 난파선처럼 흔들리는 이야기 속 유일하게 빛난 인물이 핼리 베일리였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아름다운 심해 풍경은 황홀했지만, 싱싱한 바다 생물이 되어버린 조연들은 어색하고 늘어난 상영 시간은 지루했다. 반면 흑인이라는 이유로 가혹한 비난과 증명 요구를 견뎌야 했던 핼리는 힘찬 노래와 준수한 연기, 주체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제 몫을 해냈다.
새 세상의 에리얼은 자유를 갈망하고, 미지의 탐험을 고대하며, 다른 세계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왕자를 운명의 상대로 선택한다. 우리가 디즈니 ‘인어공주’를 사랑했던 이유도 단지 그가 붉은 머리의 미녀라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저 너머의 세상을 꿈꿀 자유는 공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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