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민주당과 진보를 연관 짓는 자체가 진보 모독이다

이기홍 대기자 2023. 5. 2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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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봉투, 코인 터지자 “진보 위기” 비판 쏟아지는데
진보 가면 쓰고 권력과 특권 향유해온 시대착오적
좌파집단을 진보로 불러주는 건 언어도단
‘좌파=진보’ ‘우파=보수’ 도식부터 재정립해야
이기홍 대기자
전당대회 돈봉투, 김남국 코인 등 부패·도덕성 사건이 잇따르자 “진보가 무너졌다” “진보의 위기” 등등 더불어민주당을 질타하는 우파·보수 논객들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비판의 전제 자체에 찬성할 수 없다. 이런 의문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진보였단 말인가?”

민주당 일부 의원들과 김어준 씨 등이 “진보는 꼭 도덕성을 내세워야 하나” “진보는 돈 벌면 안 되나”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우화 같은 장면이 상상됐다.

“왜 우리 개들은 밤에도 마음 편히 못 자고 꼭 집을 지켜야 하나.” 개들의 대표를 자처하는 몇몇 견공들이 수천 년간 개들에게 당연시돼 온 ‘불침번 프레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개로 착각한 고양이들이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진보로 인정해주지 않을 인사들이 스스로를 진보로 착각한 코미디 같은 풍경이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진보로 규정할 수 있는 핵심 요소를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보면 △세상의 변화와 신사조(思潮)에 대한 열린 자세 △인권 △성평등 △약자·소수자 보호 △환경 보호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좌파그룹을 대입시켜 보자. 세상은 다양성 다층성 탈국경 탈공간의 최첨단 시대로 질주하는데 이들은 여전히 20세기 초중반 식민착취·계급투쟁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이념적으로 가장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집단이다.

외교와 국제정세를 보는 시각에서도 진보의 정반대, 즉 구한말로 치면 위정척사파와 같은 입장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는 눈은 냉전 종식 이후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그 허구성이 다 드러난 1980년대 초반 수정주의 사관에 머물러 있다. 세상은 초 단위로 급변하며 펄펄 끓는데 개구리는 수십 년 전 패러다임의 우물 속에서 반일 친중만 외친다.

해외유학이 글로벌 사고(思考)의 지표일 수는 없지만 참고용으로 필자는 어제 기준으로 국회 홈페이지에 등재된 의원 299명의 학력·이력을 따져봤다.

민주당과 민주당 계열 무소속을 합쳐 176명 가운데 해외유학 출신은 21명이다. 그중 중국이 3명이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각 1명이며, 영미권 유학자는 16명이다.

국민의힘은 114명 가운데 유학파는 24명이며 이 중 22명이 영미권에 다녀왔다. 국민의힘 역시 토착 유지나 행정·법조 관료 출신이 주를 이루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민주당과는 차이가 크다. 1년 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내한 만찬 때 헤드 테이블에는 한덕수 이준석 안철수 박진 등 하버드대 출신들이 여럿 보였다.

개방과 열린 자세는 진보의 핵심이다. 극좌나 극우는 폐쇄적이다. 한국 좌파의 우물 안 개구리 현상은 우리민족끼리라는 폐쇄적 민족주의에 감염된 탓이 크다.

진보의 또 다른 덕목인 성평등에 관한 한 민주당은 얘기도 꺼낼 수 없는 처지다. 충남 부산 서울 등의 광역단체장을 필두로 지난 6년간 민주당 인사들이 저지른 성폭력 논란은 세계 정당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수준이다.

인권도 북한 인권, 대북전단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이념지향과 맞지 않는 인권은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옥죔으로써 진보의 가치에 어긋났다. 굴곡진 역사의 희생자를 명예회복시키고 보상하는 것도 우익에게 당한 경우에만 국한되고, 좌익에 의해 자행된 수백, 수만배의 고통에 대해선 고개를 돌린다.

도덕성은 윤미향 조국 사태로 바닥을 쳤는데, 문재인 다큐영화가 문 정권 말기 1억 원의 지원을 받았다는 소식에 이르고 보면 후안무치 기록이 계속 경신되는 느낌이다.

평등의 가치도 경제·교육 평등을 강조하며 국민에겐 하향 평준화를 강요해놓고 자신들은 입만 열면 비난하던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이용해 특혜를 누림으로써 훼손시켰다.

진보의 또 다른 핵심 덕목은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접근법인데 한국의 좌파는 서구의 진보세력이 맞서 싸웠던 괴담과 선동을 최대 무기로 적극 활용한다. 과거엔 관제 방송이나 단체들이 괴담과 선동을 주도했는데 이젠 당 대표가 직접 “독극물” “이완용”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주도한다.

세계가 바로 우리 대문 앞에서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한국의 좌파는 검은 커튼을 쳐놓고 어둠 속에서 제 식구 눈 찌르기에 여념이 없다. 국제경쟁과 국가발전 같은 시대적 과제에 눈 감고 역사논쟁 같은 소모적 담론에 매달리며 우리민족끼리의 논리에 푹 빠져 우물 안에서 물장구치고, 돈맛 권력 맛에 빠진 패거리로 전락한 것이 오늘날 좌파의 민낯이다.

제도권 좌파의 질적 변질은 문재인 집권부터다. 그 전까지는 제도권 내 좌파는 온건 진보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문 정권 들어 시대착오적 좌편향 인사들이 정권 중앙을 차지하며 온건 진보를 밀어냈다. 링컨은 사람을 알려면 권력을 줘보라고 했다. 최순실 덕분에 정권을 차지하고, 코로나 덕분에 180석 슈퍼 권력을 갖게 되면서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권력 재력 성(性)을 차지하는 수단으로 진보라는 수식은 유용했다. 사이비 보수인 극우 부패 세력이 적극 도왔다. 하지만 진보팔이의 실체는 6년간 다 드러났다. 이제는 스스로 진보 ‘레테르’를 내려놔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보수 진보의 개념부터 다시 정리해야 한다. 우리는 200만 명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나 차베스를 진보라 부르지 않는다. 70년대 칠레 피노체트 군부정권을 보수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좌파=진보, 우파=보수라는 등식을 사용해왔다. 그러다 보니 주사파의 후예들, 계급 민족해방 혁명 망상에 젖은 수구적 이념세력들이 진보로 자처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성취마저 부정하는 극우세력이 보수의 깃발을 흔드는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런 언어도단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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