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코로나의 끝, 매너의 시작

박상현 기자 2023. 5.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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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이달 초 한 피아니스트 연주회에 다녀왔다. 해마다 꼭 한 번은 실연(實演)을 챙겨 보는 연주자의 공연이었다. 콘서트홀에 들어가니 1층 1500여 객석이 꽉 차 있었다. 좌석을 한 칸씩 비워두고 객석 절반만 관객을 받았던 코로나 방역 지침이 무척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정시가 되자 연주자가 핫핑크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을 첫 곡으로 연주했다.

약속된 고요함 속에서 불편한 소음이 들려온 건 연주가 시작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을 때다. 잠시 일렁이다 멈추는 소음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옆자리엔 열 살 정도 된 아이가 보호자 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지루했는지 프로그램 책자를 폈다가 접었다가 동그랗게 말았다가 바닥에 떨궜다가 줍기를 반복했다. 간혹 자리에서 엉덩이 떼고 고개를 돌려 뒤편 어딘가 앉은 엄마를 찾기도 했다. 비닐 소재 상의를 손으로 계속 쓸어내리며 바스락 소리 내는 사람, 악보 속 음표 숫자만큼 자주 마른 기침을 뱉는 사람,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는 사람도 가까이에 있었다.

앞자리 커플은 남자가 손가락으로 여자 옆구리와 볼을 찌르며 장난을 쳐댔다. 남자는 목이 뻐근한지 상모 돌리듯 요란한 스트레칭도 자주 했다. 초점을 아무리 연주자에게 맞춰도 정신 사나운 움직임이 내 시야로 비집고 들어왔다.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그 남자의 뒤통수를 갈겼다. 캄캄한 공연장 곳곳을 밝히는 휴대전화 화면 불빛도 거슬렸다. 연주자가 독차지해야 할 관객들의 시선을 그 불빛이 빼앗아 갔다. 인터미션(중간 휴식) 땐 뒷자리 여성이 스피커폰을 켠 채 5분 넘게 영상 통화를 했다. 모두가 석고상처럼 굳은 채 공연을 볼 필요는 없지만 이날 관람 매너는 처참했다.

유독 자리 운이 따르지 않은 공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의 관람 태도가 3년 4개월간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 여파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팬데믹이 강제로 사람들을 각자의 집 안에 감금한 지난 몇 년간 우리는 타인을 크게 의식할 필요 없는 시간을 보냈다. 타인과 격리돼 있으니 본인이 내는 소음이나 시선 끄는 행동을 돌아볼 기회는 줄어들었다. 집구석 소파에 앉아 소비하는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바깥에서 즐기던 문화 생활을 대신했다. 그런 관람 방식의 관성이 코로나 터널을 빠져나가며 다시 찾게 된 공연장까지 이어진 것 아닐까.

공연 며칠 후 우리 정부는 코로나19 위기 경보 ‘심각’ 단계를 해제했다. 우리가 바라던 ‘엔데믹’이 형식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흔적 가운데 명백히 지워진 것은 마스크 해제 정도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복원해야 할 사회적 가치 가운데 ‘매너’는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생존 위기를 겪으며 내세우던 이기심을 뒤로하고, 다시 여러 사람과 접촉하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공연장에서 겪은 불쾌함과 불편함이 오래갈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매너를 잠시 잊어버렸을 뿐, 아예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진정한 엔데믹의 필요충분조건은 매너 복원일지도 모르겠다. 그 조건이 갖춰질 때 질병의 고비를 넘어 한 단계 성숙한 우리 사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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