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낯익은 폭력, 낯선 코미디

기자 2023. 5.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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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으로서 영화는 경험재라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식당 음식이 맛없어도 값을 치러야 하듯, 재미없는 영화여도 환불을 요구할 수 없다. 많은 영화가 극장에 걸리지만 흥행작은 적다. 대부분의 영화 광고가 허위거나 과장이라는 방증이다. 지루한 영화가 제공한 숙면효과를 긍정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영화의 속성상 상품의 질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점은 상업적으로 큰 단점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영화 제작자들은 사람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이야기 소재와 구조를 양식화한 장르를 고안했다. 관객은 구미에 맞는 영화 장르를 골라 볼 수 있게 되었고 불만도 줄었다. 그만큼 영화는 안정적 상업성을 얻었다.

장르영화의 고객은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는다. 코미디 영화가 간질이는 유쾌, 로맨틱 코미디가 흩뿌리는 상쾌, 액션영화 속 팽창하는 완력에서 통쾌함을 얻으면 만족한다. 관객은 뻔한 내용은 용인해도 장르에 기대하는 감정을 얻지 못하면 불쾌해한다. 공포영화가 무섭지 않거나, 코미디 영화가 웃기지 않을 때 시간과 돈이 아깝다.

2006년은 한국 영화계의 활황기였다. 10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대작 <괴물>을 위시하여 웰메이드 장르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프랜차이즈 코미디 <가문의 부활> <투사부일체> 등은 관객들이 제일 좋아한 장르답게 박스오피스 앞줄에 섰다.

한국 영화 풍년의 해에 큰 기대를 받으며 개봉했으나 장르의 법칙을 어겨 참패한 영화가 있었다.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사진)은 제작 전부터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로 소문이 자자했다.

제작 편수가 많아 캐스팅난이던 시기였음에도 한석규, 이문식, 오달수 등 티켓 파워가 있는 주·조연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출연 의지를 보였다. 시나리오에 걸맞게 만듦새 또한 훌륭한 <구타유발자들>은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코믹잔혹극’이라 선전하며 개봉했다.

한석규가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당시 코미디 전문 배우로 단연 1순위였던 이문식과 오달수가 좌우에 포진된 ‘코믹잔혹극’에 관객은 당혹했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표를 끊은 관객들은 시종 음울하고 유혈이 낭자한 잔혹물에 기분이 상했다. 실제 겪었거나 목격한 적 있는 학교폭력과 군대폭력의 폐해가 생생하게 복원돼 있었다.

배우들의 열연으로 사실적으로 재현된 악몽을 ‘코믹잔혹극’으로 위장했다고 오해할 만큼 낯선 코미디였다. 코미디 영화 흥행에 편승하려는 저열한 홍보전략에 속았다며 관객은 분노했다.

<구타유발자들>은 인적 드문 교외에서 하루 내 벌어진 잔혹극이다. 살벌한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폭력으로 매개돼 있다. 영화는 폭력의 연쇄와 파국의 전모를 정밀하게 구조화한 공포극에 가깝다. 상처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혹독한 정서적 충격을 받는다.

영화는 폭력 지대로 학교와 군대를 지목하고 있다. 제도로부터의 도피는 낙오이기에 꼼짝없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는 포로의 절망. 맞으며 습득하고 때리며 답습한 폭력의 논리. <구타유발자들>은 잔혹한 외피를 입었지만 코미디가 맞다. 영화의 대미에서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경찰은 어이없게도 현재의 폭력을 유발한 과거의 가해자다. 공권력을 얻은 폭력배가 피해자들에게 명령에 가까운 사과를 한다. 과거의 일은 잊고 용서하란다. 할 말을 잃은 상태에 빠지면 허탈해 웃음이 난다. <구타유발자들>은 우리에게 낯익은 폭력을 낯선 코미디 형식으로 고발한 2000년대 걸작이다.

아들의 학폭 사실을 무마하려던 검사 출신 아버지가 경찰 고위직에 오를 뻔했다. 아들은 명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학폭 가해자가 변호하는 세상이라니…. 코믹잔혹극은 어색할지 모르겠으나 잔혹한 코미디는 현실 도처에 널렸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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