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부처님오신날의 삐딱한 생각

기자 2023. 5. 2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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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학산 약천사 근처 사하촌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물 반찬에 예술 같은 된장찌개 그리고 돌솥밥. 방풍나물과 꽁치조림이 특히 훌륭했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심학산 둘레길을 걸어 사무실에 복귀하기로 했다. 나른한 초여름 햇볕을 덮고 어느 그늘 아래에서 죽은 듯 낮잠 한 방 때리고 가라며 유혹하는 날씨.

절 입구부터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연등이 길 따라 가득하다. 이 구역을 불국토로 선포하려는 듯 날렵한 기와지붕의 추녀 끝에서 떨어져 깔리는 풍경 소리. 가파른 비탈이라서 들이치는 풍광이 사뭇 압도적이다.

종무소 앞 계단에서 스님과 몇 분이 서서 담소 중이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시는지 한바탕 웃음소리가 주위의 모든 바람 소리를 눌렀다. 그 웃음 끝을 붙잡고 누군가의 말이 또 뒤따라 나오기를. 아, 그래요, 부처님 말씀대로…?

바람이 풍경을 두드리자 다시 소리의 파고가 높아져서 그다음 말을 나의 귀는 잡아채질 못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 저켠에서 은근한 용심이 하나 일어나지 않겠는가. 지금은 겨우내 곧추섰던 사물도 이미 다 풀려버린 시기이다. 하지만 늘 뒤죽박죽인 게 세상의 질서, 그중에서도 또 왕왕거리는 정치판의 오합지졸들이 판을 치는 가운데 그 모든 것에 부처님 말씀을 갖다 붙이려는 수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간지러운 마음을 어디에 닿게 하고 싶지만 부려놓을 곳이 마땅찮다. 그게 한 조각의 무명이라면 개울물에 빨아 실팍한 돌에라도 널겠지만 마음이란 몸에서 끄집어낼 수조차 없는 게 아닌가. 부처님 하신 대로 한다지만, 졸졸졸 따라가는데 문득 이승에 나투신 부처께서 왜 다 큰 어른이 자꾸 남의 등에 업히려 드느냐, 정색하고 지적하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대웅전 앞 계단을 올라 넉넉한 약사여래불전에 절을 올리려다가 냅다 산으로 들며 나의 용심을 점검해 보았다.

돌솥에 달궈진 물이 팔팔 끓어 쌀을 밥으로 만들었고 이 밥은 나의 허기를 정확히 달래주었다. 입술에도 한 방울 떨어진 봄나물 향기는 입맛과 궁합을 맞추었다. 허나 허한 마음에 꼭 맞는 진리는 어디에 있어 그 빈 구멍을 채우나. 두 귀에 꽉 맞는 마개는 어디에서 찾을까. 부처님의 말씀이라지만 그건 그분께서 선취한 그분의 것일 뿐!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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