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근원을 말하지 못한다면, 공감의 외침도 공허한 메아리다[전문가의 세계 - 박승일 영화X기술]

기자 2023. 5. 2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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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 임팩트 맨 : 비우고, 버리고, 끊었다…‘지구 살리기’ 눈물겨운 고군분투

기후위기는 어느새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아직 5월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 최고기온은 30도를 넘어섰다. 한국만이 아니다. 베트남과 인도에서는 40도가 넘는 기록적인 폭염이 발생했고, 캐나다에는 잦은 산불이, 아르헨티나에는 최악의 가뭄이, 이탈리아에는 폭우와 홍수가 몰아닥쳤다. 100년에 한 번 있었던 위기가 이제는 5년에 한 번씩 지구를 강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위태로움과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기후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2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교체하고 일상화된 쇼핑을 통해 필요와 무관한 소비를 이어가며 보증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동차를 바꾸고 있다. 어떤 주식에 투자하고 어떤 집을 사야 하는지가 더 큰 관심사이다. 어찌된 일일까? 물론 무관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환경보호를 위해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를 쓰고,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쓰고 있다. 그런데 잠깐만, 이건 너무나도 비대칭적이지 않은가! 이런 실천만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애초에 그건 위기가 아니지 않은가!

무한도전, 지구를 지켜라!

<노 임팩트 맨>은 뉴욕에 사는 한 가족이 환경보호를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목이 암시하듯, 주인공 콜린은 지구 환경에 그 어떠한 임팩트(영향)도 미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의 생활 습관 전체를 근본적으로 개조해나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전기를 아끼기 위해 집 안에서 텔레비전과 에어컨 등의 전자제품을 다 치우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포장 음식을 단호히 끊고, 이산화탄소를 만들지 않기 위해 탄소 배출 교통수단인 자동차, 비행기, 지하철, 택시도 타지 않는다. 이동이 필요할 때는 자전거와 킥보드를 탄다. 물을 오염시키는 합성세제도 쓰지 않고, 대신 친환경 세제를 직접 만들어서 쓴다. 식품 운송 과정에서도 탄소가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멀리서 운반되는 농산물 대신 근교에서 재배된 것들만 먹는다. 뉴질랜드산 과일은 노! 같은 이유에서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축산업이야말로 탄소 배출과 환경오염의 주범 중 하나이기에 이들은 자연스레 육식을 끊고 채식으로 돌아선다. 양배추와 감자, 당근이 이들의 식탁을 채워 나간다. 심지어 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마저도 퇴비로 활용하기 위해 작은 상자에다 지렁이를 넣고 키우기까지 한다. 집 안 전체에 파리가 들끓는 건 감내해야 할 작은 고통일 뿐이다. 아이의 기저귀를 일회용 대신 천으로 바꾸고 구독하던 신문과 잡지도 전부 끊고 키친타월과 화장실 휴지도 낡은 옷감으로 다 바꾼다. 하루에 매립되는 일회용 기저귀만 미국 전역에서 4900만개에 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신문과 화장지 등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양의 나무를 잘라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가 쉽게 외면해왔던 이 사실들이 이들 부부에게는 행동의 변화를 실천하기 위한 지극히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작지만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점차 실천의 강도를 높여 나간다. 단연 냉장고야말로 소비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이기에 이들은 거대한 냉장고 대신 나이지리아식 천연 냉장고를 도입한다. 항아리 두 개를 겹쳐 놓은 뒤 그사이에 모래를 채우고 물을 뿌려서 기화열로 주위의 열을 빼앗는 방식이다. 성능도 크기도 부족하기에 그만큼 소비는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들은 전기 사용량을 계속 줄여나가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는 아예 모든 전기를 차단한 삶을 살기로 한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모든 문명적 삶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심은 이토록 단단하다.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순수한 동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콜린의 아내 미셸은 스스로를 TV 중독자이자 쇼핑 중독자라고 밝힌다. 쇼윈도에 걸려 있는 명품 가방에 눈을 빼앗기고, 콜린한테 커피 한잔 마시게 해달라고 화를 내고, 직장에 출근해서는 마음껏 전기를 쓸 수 있다고 웃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평범한 우리네 모습이다. 심지어 그녀는 프로젝트 시작 전에 사고 싶은 것을 왕창 구매해버리는, (콜린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 발악’을 감행하기까지 한다.

소비에 대한 욕망은 그만큼이나 참기가 어려운 법이다. 콜린도 마찬가지다. 그는 역사책을 쓴 기성 작가인데, 행동주의 작가로서의 자기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이었던 셈이다. 여기저기서 긍정적인 반응도 많았지만,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이 프로젝트가 식상한 시트콤 같은 데다 자기 홍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결국 콜린 또한 인정을 갈구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미셸이 자기 욕망에 충실했다면 콜린은 사회적 인정 투쟁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이들의 실천은 그 동기가 순수하거나 고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의 계기가 된다. 동기야 어떻든 간에,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동기가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순수성과 실천의 진정성을 따져 묻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위기가 너무나 급박하고 거대하다. 오히려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일단 환경보호를 위한 작지만 가능한 실천들을 일상 속에서 반복하고 그것을 대중적 규범으로 확산시켜나가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콜린과 미셸의 저 요란한 실천과 언론의 조명은 적어도 대중의 관심을 촉발하고 환경보호를 의제화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앞으로 내디디는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실천이 반복되면 자연스레 의식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이들 또한 실천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발전된 의식을 갖게 된다. 프로젝트 초기에 콜린은 환경보호가 헬스장 한 번 안 가고 몸무게 10㎏을 빼는 운동이고, TV 안 보고 더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이며, 지역의 제철 음식으로 아내의 당뇨병을 막는 치료법이라고 강변한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겠지만, 여기에는 환경보호마저도 개인의 이익으로 수렴하는 미국식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만 가득할 뿐, 기후정의와 탈성장, 소비사회의 문제,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 정치적인 변화의 가능성 등에 대한 어떤 사유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계속된 실천 속에서 점차 종이 빨대와 텀블러, 에코백 등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음을 절감하고, 결국 ‘노 임팩트 맨’ 프로젝트의 한계를 고백하기에 이른다. 혼자만의 환경보호운동에서 벗어나, 이제 그는 과잉 소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학생들에게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교육하고 환경보호단체에 자원봉사를 나가기 시작한다. 실천이 의식을 고양시켜나가는 지점이다. 당연히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미셸 또한 울며 겨자 먹기 식의 동참에서 벗어나 훨씬 더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이것이 콜린과 미셸이 스스로 체득한, 그리고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하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가 않다. 그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가열한 노력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들어본 독자도 있겠지만, 지구 환경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구분이 요구될 만큼 극단적인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 말 그대로 인류 활동이 지구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질시대의 이름을 ‘인류’가 포함된 말로 바꿀 만큼 말이다. 플라스틱, 이산화탄소, 수질·토양·대기 오염 물질, 쓰레기, 방사능 물질 등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부산물이 지구 표면을 뒤덮으면서 도리어 인류의 생존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핵심은 이것인데,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자본주의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사용한 화석연료의 약 절반이 냉전 종식 이후에 소모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자본주의야말로 기후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기에, 뒤집어 말하자면 기후위기에 대한 해법은 바로 이 자본주의 비판을 향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노 임팩트 맨>에는 놀랍게도 자본주의 비판이 없다. 콜린은 환경오염에 맞서 스스로 투사가 되고자 했지만, 그래서 안락한 제국적 생활양식을 버리고 불편한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했지만, 정작 이 모든 위기의 원인인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기이하게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와 함께 친환경 농사를 지었던 한 환경운동가는 당장의 이윤 추구를 핵심으로 삼는 미국의 기업 자본주의를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하면서, 콜린이 모순적이게도 바로 그 기업들을 문제 삼지 않았기에 대중과 언론의 큰 이목을 끌 수 있었다고 차분히, 그러나 뼈아프게 지적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내내 개인적인 의식 전환을 강조할 뿐, 그리고 끝에서야 잠깐 연대의 필요성을 제시할 뿐, 무엇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고 무엇에 대한 연대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는 에너지 정책법에 동의한 정치인을 만나러 가지만 스스로 정치적인 운동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적이 없는 싸움이고 그렇기에 이 싸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 되고 만다. 단언컨대, 현재의 기후위기는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만, 그리고 자본주의의 환경 파괴에 대한 대중의 저항과 연대 및 이 모든 결과로서의 거대한 방향 전환을 통해서만, 아주 조금이나마 극복될 수 있다.

모든 기술을 거부하고 자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저항의 방식이라고 믿는 콜린과 미셸을, 나는 ‘순진한’ 기술 최소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 기술 혁신이 현재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믿는 (순진한) 기술 최대주의만큼이나 순진한 기술 최소주의 또한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것은 매한가지이다. 도시와 기술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환경보호 실천을 ‘개인적으로’ 이어나간들,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지금도 계속 쏟아내는 오염 물질과 그로 인한 환경오염을 근본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다. 물론 개인의 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콜린과 미셸의 노력처럼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예컨대 이것은 운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각자는 서로를 배려하고 최대한 안전에 주의하면서 운전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도로 신호와 교통 규칙, 교통 법규 등과 같은 강력한 외부 규범이 전제되어야만 더욱 안전한 운전을 할 수 있다. 아예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즉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선이 될 수는 없다. 문제가 시스템 차원에서 발생한다면, 해법 또한 시스템 차원을 겨냥해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말이다.

“자본주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 상상이 더 쉽다.”

아마도 지구의 평균기온은 계속 높아질 것이고 태풍과 홍수, 폭염, 가뭄, 산불은 마치 정기 세일 행사처럼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바로 그 기후위기로 인해 지금의 안락한 생활양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동차를 탈 수 없다거나 일주일에 3일만 전기를 쓸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거짓말 같은가? 지금 뭔가를 하지 않으면 미래는 훨씬 더 암울하고 비극적일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 세계의 종말이 올까 봐 두렵고 더불어 이 자본주의의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잃을까 봐 두렵다. 물론 이 두 항은 등가가 아니다. 세계의 종말이란 자본주의의 종말마저 포함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굴려보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자본주의의 종말이다. 너무 센 말인가? 그렇다면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모두가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속도를 제한하고 음주 운전을 금지하듯, 약탈적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구 환경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규제하고 윤리와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변화는 권력자와 자본가의 자발적 협력이 아닌, 오직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의 저항과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공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아울러 인문학도 공부하고 있다.

정직한 공부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기계, 권력,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승일 캣츠랩 소장·기술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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