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하미마을

서의동 기자 2023. 5. 2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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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2020년 4월28일 청와대 앞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 103명의 얼굴이 담긴 피켓을 들고 정부의 사과와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트남 중부 도시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로 통한다. 한국인의 인기 관광지이지만, 반세기 전 벌어진 베트남 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다낭에선 202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미군 수송기 바퀴에 주민들이 매달리던 것과 유사한 탈출극이 1975년 3월 말 벌어졌다. 한 달 뒤 수도 사이공(현재 호찌민)의 대통령궁이 함락돼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야경이 환상적인 다낭 근처 ‘호이안’과 옛 왕조의 수도 ‘후에’ 등에는 전쟁의 자취가 남아 있다. 후에 궁궐에선 포격으로 움푹 파인 담장이나 총탄 자국 남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호이안에서 해안 따라 다낭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곳에 하미마을이 있다. 1968년 2월 한국군이 베트남 주민 135명을 집단학살하고, 시신을 불도저로 훼손한 곳이다.

한국군의 학살 사건은 1990년대 국내 활동가들에 의해 조명되기 시작했다. 법원은 지난 2월7일 퐁니·퐁넛 사건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한국군의 학살이 55년 만에 법원에서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증거자료가 많은 퐁니·퐁넛 사건과 달리 여타 사건들은 소송으로 진상이 가려지기 쉽지 않다.

정부 차원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베트남이 사과·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가 내내 닫힌 채로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미마을엔 참전 군인들의 지원을 받아 2001년 건립된 위령비가 있다. 뒷면에 학살극을 담은 위령시를 새겼으나 군인들이 부대 이름을 빼달라고 하자 주민들이 아예 대리석으로 덮어버렸다.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일단 봉인해 두겠다는 의미다.

참전 군인들만 ‘가해자’의 업을 짊어지고, 그들을 전장에 보낸 국가는 책임을 회피하는 지금 상황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과거를 직시하고 성찰하려면 먼저 진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정부가 직접 나서기 어렵다면 적어도 진상조사 요구를 외면해선 안 된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4일 하미 학살 피해자 등이 낸 조사 개시 요청을 각하한 것은 그 기회를 놓아버렸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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