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깜깜하고 불확실한 시대… 다시 카프카를 부르다

김용출 2023. 5. 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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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탄생 140주년 기념 단편선 ‘돌연한 출발’
벌레로 변한 주인공 공포·구원 그린 ‘변신’
아버지에 대한 거대한 절망 표현 ‘선고’ 등
출구 없는 삶·불안… 20세기 문학의 징후
예민하게 포착한 카프카 작품 32편 담아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 깨는 도끼”
친구에 보낸 편지·직접 그린 드로잉도 수록

한 마리의 쥐가 있다. 부지런히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린다. 성취도 있는 것 같아서 행복하기도 하다. 더욱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린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벽이 보여서 행복했었다. 그런데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엔 덫이 있다. 나는 그리로 달려가고 있다.’―‘너는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돼.’라고 고양이가 말하며 쥐를 잡아먹었다.”(‘작은 우화’ 전문)
카프카 탄생 140주년을 맞아서 기념 단편선이 출간됐다. 카프카는 불확실한 세계, 출구 없는 삶, 재앙 같은 불안 등 20세기 문학의 징후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제대로 가는 줄 알고 신나게 달렸는데, 맙소사,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고양이 입이라니. 그런데 그 쥐가 바로 당신이라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일단 달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서늘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겠다.

인연의 연쇄에 따른 불확실한 세계, 출구 없는 삶과 재앙 같은 불안, 병적인 소외와 우울···. 20세기 문학의 징후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했던 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탄생 140주년을 기념한 단편선 ‘돌연한 출발’(전영애 옮김, 민음사)이 지난달 출간됐다.

책에는 대표작 ‘변신’과 ‘선고’, ‘시골의사’ 등 그의 문학을 압축한 서른두 편이 담겼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마치 불행처럼 다가오는 책들이 필요해···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라는 명문이 담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와 대학 시절 노트에 그린 드로잉 등도 수록됐다. 그의 인생 역정을 배경으로 단편집에 실린 주요 작품을 살핀다.
‘돌연한 출발’
문제적 작가 카프카는 1883년 기독교와 유대교가 혼재하는 도시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인 상인 아버지와 부유한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라하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법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뒤 1908년 근로자 사고 보험국에 취직한 후 14년간 관리로 일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출근해 오후 2시까지 일한 뒤, 귀가해선 서너 시간씩 글을 쓰는 생활을 이어갔다. 카페에서 예술가들과 교류도 하고. 일과 글쓰기 사이에서 ‘기동연습 생활’을 이어갔다. 그래서 오히려 문학은 그에게 삶의 도피처였고, 세상을 향한 열망이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이었다. “나는 ‘문학’이다. 문학 아닌 모든 것은 내겐 지루하고, 따라서 나는 그것들을 혐오한다.”

1912년, 그는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의 도움을 받아서 첫 단편집 ‘관찰’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다. ‘관찰’에는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나무들’, ‘집으로 가는 길’ 등 세상에 대한 서늘한 시선과 존재의 불안, 이방인적 시각이 담긴 7편의 소품이 실렸다.

이후 몇 편의 발표하고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 1915년, 강렬한 메시지와 문제적 인물을 담은 ‘변신’을 출간했다. 작품은 특히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만한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사람이 아닌 곤충이 돼 있는 자신을 보는 충격과 공포란.
카프카가 대학 시절 노트에 드로잉한 한 그림. 민음사 제공.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막스 브로트 아카이브(The National Library of Israel. Max Brod Archive)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로 나누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덮여 있었다. 다른 부분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서 맥없이 허우적거렸다.”(57쪽)

‘법 앞에서’는 같은 해 주간지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법은 잠자는 자를 돕지 않는다’는 서늘한 법언을 그린 듯한 소품. 한 시골 사람이 법에게 들어가려고 하지만, 문지기는 각종 명목으로 가로막는다. 시간이 흘러서 죽음을 눈앞에 둔 시골사람이 문지기에게 왜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는지 묻자, 문지기가 하는 말.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가서 문을 닫겠소.”(56쪽)

1916년 하룻밤 사이에 썼다는 ‘선고(판결)’를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 위에 길게 드리운 아버지의 모습을 거대한 절망으로 표현했다. 아버지는 사업가인 게오르그 벤데만의 사랑을 방해하고, 게오르그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러시아 친구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절망한다. 마지막 장면은 자못 충격적이다.

‘학술원에서의 보고’는 원숭이를 주인공 화자로 내세운 작품으로, 1917년 잡지에 발표됐다. 원숭이 페터는 자신의 기원과 함께 젊은 시절 경험한 자유의 기억을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유일한 방법이 되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학술원에 폭로한다.

“되풀이하겠습니다만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모방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아니었지요.”(204쪽)

1920년 전후 창작했던 표제작 ‘돌연한 출발’은 목적지도, 양식 준비도 없이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그린 짧은 소품. 갑자기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 오라는 지시에 걱정하는 하인의 우려와 불안에도, ‘나’는 돌연한 출발을 감행하려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늘 돌연한 출발일지도. 삶도, 사랑도.

“여행이 워낙 길 터이니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양식을 마련해 가 봐야 양식이 내 몸을 구하지는 못하지.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야말로 다시 없는 정말 굉장한 여행이란 것이다.”(155쪽)

그는 1917년 폐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회사를 퇴직했다. 신경쇠약으로 발작을 일으키던 그는 1924년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의 나이 41세.
카프카가 대학 시절 노트에 드로잉한 한 그림. 민음사 제공.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막스 브로트 아카이브(The National Library of Israel. Max Brod Archive)
작품은 당대에는 거의 팔리지 않았고, 그 역시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길 꺼렸다. 작품이 담긴 두꺼운 공책 스무 권을 불태우기도 했다. 죽기 전, 평생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행히 브로트는 그의 유언을 어기고 2차 대전이 끝난 뒤 작품을 출판했다. ‘성’과 ‘소송’, ‘실종자’ 등등.

그레고르 잠자(‘변신’), 게오르그(‘판결’), 요제프K(‘소송’), ‘성’과 ‘실종자’의 K···. 대부분 독일어로 쓰인 그의 작품들은 미완성이 많았음에도, 그가 작품을 통해 창조한 주인공들은 그의 사후세계를 점령했다. ‘성’과 ‘실종자’가 창조한 인물 K 역시 문학사의 전매특허가 됐고.

20세기적 징후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작가 카프카. 친구 브로트가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지 묻자, 그는 대답했다.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아.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야.”

시대는 여전히 숨 넘어가기 일보직전이고, 세상은 여전히 캄캄하고 불확실하다. 카프카적 시대와 세상 때문에 여전히 카프카들이 세계 곳곳에서 출몰한다. 어쩌면 기사를 읽고 있는 이 순간, 당신 옆으로 또다른 카프카가 걸어오고 있을지도. ‘도시 인디언’이라고 불릴 정도로 도시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도시 산책자’ 카프카가···.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 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끝내 고삐를 집어 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고는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 모가지도 말 대가리도 없이.”(‘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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