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노란봉투법의 운명

선담은 2023. 5. 2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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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지난해 7월21일 오전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도크 화물창 바닥에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 안에서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농성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선담은 | 정치팀 기자

“100% 거부권 행사할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이건 야당이 알리바이를 만드는 거죠.”

지난 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야당 공조로 본회의 직회부가 결정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의 운명을 두고 노동계 한 인사는 체념한 듯 이렇게 말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간호법 제정안에 연이어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면서 두 법안이 사실상 폐기됐는데, 여권이 노란봉투법에 대해서도 거부권 방침을 밝힌 만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란 얘기였다.

그는 “이번 판이 ‘나가리’ 되면 앞으로 10년간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온다”며 이 법안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다. 내년 총선에서 노란봉투법에 그나마 우호적인 야당의 과반 의석 확보가 불확실한데다가, 윤 대통령 임기 중 헌법재판관 9명 전원과 대법관 14명 중 13명이 교체돼 문재인 정부 때에 견줘 사법부의 보수 색채가 짙어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2015년 4월 당시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처음 발의한 노란봉투법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8년이다. 노동자의 쟁의행위를 상대로 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을 보수정당과 재계가 반대하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앞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9년 노동쟁의조정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대구의 한 자동차부품 회사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파업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것도 그해였다. ‘노조 때리기’로 지지율 반등을 경험한 윤 대통령이 노란봉투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새삼스럽진 않을 이유다.

지난 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당 간사인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노란봉투법’ 본회의 직회부 요구안 상정에 대해 전해철 위원장과 야당 간사인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란봉투법은 2009년 쌍용차 파업 뒤 경찰이 낸 손배 소송에서 법원이 노조 조합원들은 회사와 경찰에 47억원가량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뒤 입법이 추진됐다. 2013년 11월 주부 배춘환씨는 월급 가압류 등으로 고통받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돕겠다며 4만7천원을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보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가수 이효리, 세계적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 등이 노란봉투 모금 캠페인에 참여했고, 합법 파업에 무분별한 손배·가압류를 막아야 한다는 입법 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법안 발의 이후에도 국회에서의 논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혔던 노란봉투법이 다시 등장한 건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 때였다.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은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합법 파업’에 나섰던 하청 노동자들에게 470억원의 손배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1대 국회에서 새로 발의된 노란봉투법에는 기존 내용에 더해 하청 노동자가 ‘진짜 사장’인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사용자’ 개념을 확대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지금 시점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행보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명백한 상황이라면, 두 정당은 노란봉투법 입법이 불발됐을 때 어떤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양곡관리법 개정안처럼 재표결 절차를 거친 뒤 부결되면 그걸로 그냥 끝내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민주당 소속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은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직회부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부·여당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건 인정한다. 그러나 입법부는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1㎥ 쇠우리에 자신의 몸을 가두는 ‘합법 파업’을 하고도 원청으로부터 400억원 넘는 손배 소송을 당한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 손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면 이건 너무 무책임한 정치가 아닐까.

“지금 계속 배가 산으로 가요. 일을 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지금과 같은 기회는 10년 안에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노동계 인사의 마지막 말이다. 노란봉투법은 ‘부의 요구 30일 안에 법안의 본회의 부의 여부를 투표해야 한다’는 국회법에 따라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야당 주도로 본회의를 통과할 전망이다. 산으로 가는 배를 돌려세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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