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리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는 이가 참된 인간이다

한겨레 2023. 5. 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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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픽사베이

땅속에 산이 있는 것이 겸(謙)이다.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많은 데에서 덜어 적은 데에 더해줌에,

만물의 실정을 살펴 균평하게 베푼다.

픽사베이

산을 덜어 골짜기를 돋우는 뜻은

새해가 시작되면서 한 지인의 카톡 대문에는 “골짜기가 돋워지고 높은 산과 언덕들이 낮아지는 그런 한 해!!”라는 글이 올라 있었다. 그 말이 인상적이라 아는 척을 했더니, “대통령도 아니면서 그런 화두를 갖는다니, 우습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이 말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참 밀리는 출근길에 지하철이 고장이 났다. 할 수 없이 빽빽한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문간보다 조금 안쪽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입구에는 어떻게든 버스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발을 붙이려 하고 있었고, 저 안쪽은 그래도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 “문간에선 못 타서 난리인데, 안으로들 들어가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3미터 남짓한 작은 공간은 참 보수적이었다. 한 10센티미터나 움직였을까? 누구도 스타일 구기면서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 안쪽 사람이 먼저 움직여주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게 사람의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며, 이 버스가 인생의 축소판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만원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애쓰고 노력하여 자기 삶의 자리를 만들어 간다. 붐비는 버스 속에서 그나마 서 있을 자리를 먼저 얻었는데, 거기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1.5미터 뒤에서야 지지든 볶든 말이다. 사람들로 꽉 찬 버스를 타고 일하러 가는 나는 산 위에 있는 자가 아니라 골짜기에 있는 자이기 쉽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언덕 위에 서고 산 위에 섰을 때 나는 기꺼이 내 산을 헐어 골짜기를 메우려 할까? 지인의 화두는 대통령이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골짜기이기도 하고 산 위이기도 하다. 때로는 스스로 우뚝한 산이 되지만 산 그림자가 골짜기에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지인의 카톡 문장은 기독교 바이블의 한 구절(이사야40:4)이지만, <주역> 겸괘(謙卦䷎)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위는 ‘땅’(☷), 아래는 ‘산’(☶)의 모습을 지닌 것이 겸괘(謙卦䷎)이다. 위를 ‘밖’, 아래를 ‘안’이라 부르기도 하니, 겸괘는 바깥(外)쪽이 땅이고 안(內)쪽은 산이다. 그래서 이 모양을 풀어내기를 “땅속에 산이 있다.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많은 데에서 덜어 적은 데 보태줌에, 만물의 실정을 살펴 균평하게 베푼다”라고 한다.

‘땅속에 산이 있다’라는 말은

땅이 위에 산이 아래에 있는 겸괘䷎의 모양을 <주역>에서는 ‘지중유산’(地中有山)이라 표현했다. ‘땅속에 산이 있다’ ‘땅 안에 산이 있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 함축적인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눈에 보이는 산은 대지 위에 우뚝하게 서 있다. 본래 높은 산이 땅 아래에 내려와 있으니 겸손하다고 해야 할까? 쉽사리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다지 흔쾌한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지중유산’의 풀이는 옛 선비들에게도 생각거리였는가 보다. 추사 김정희의 생각이 눈길을 끈다.

“하늘 안에 땅이 있고 땅 안에 산이 있으니, 땅이 하늘 안에 있으면 겨우 하나의 점에 불과할 따름이요, 산이 땅 안에 있으면 역시 한 줌의 돌, 한 줌의 흙일 따름이다. 이제 작게 보이는 산을 어찌 크다고 하겠는가? 나는 세상의 한 줌 흙인 미미한 존재로서 애초에 높음이 없는데 어찌 나중이라 해서 낮은 데로 굽혀서 아래에 머물러 있겠는가.”<완당집·겸겸실기>

추사는 <주역>의 글에 ‘땅속에 산이 있다(地中有山)’라 했지, ‘땅 밑에 산이 있다(地下有山)’라 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광대한 땅의 품에 안겨있는 산의 모습은 본래 작아서 낮추고 말 것도 없으니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면 될 일이라고 추사는 생각한 듯하다.

추사의 말이 한 편 멋이 있다. 그러나 추사의 말처럼 산이 ‘원래 미미한 존재’라고 한다면 많은 데서 덜어서 적은 데 더해준다는 겸괘의 구절은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한 편에 든다. 아마 마음 수양을 통해 스스로를 높게 여기는 마음 덜어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덜어낼 필요가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

주희(朱熹)가 사숙한 스승 정이(程頤)는 겸괘에 “산이 땅속에 있다”가 아니라 “땅속에 산이 있다”라 한 것에 주목했다. 높은 자가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낮게 있으면서 고귀함을 간직한다”라는 의미로 읽었다. 자기 자신이 본래 높다거나 많이 가졌다는 의식이 없이, 늘 변함없이 낮게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단단하고 밝은 덕이 간직되어 있다는 뜻으로 보았다. 말과 행동이 부드럽고 공손한데 그 속에 단단함이 없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따라 흘러 다니는 부평초에 그치고 말리라.

19세기 조선의 학자 심대윤은 “군자가 낮추어 온순한 것은 말과 행동이며, 높고 큰 것은 사업이니, 말과 행동을 낮추어 온순하기 때문에 무리와 화합할 수 있고, 사업이 높고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승복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부드러움 속에 단단함을 온축했을 때 겸손은 가능하며, 그러한 ‘지중유산’의 덕을 지님으로써 우리는 개인의 인격 면에서나 사회의 사업에서나 높은 산을 덜어 낮은 땅을 돋우는 균평을 얻을 수 있다고 <주역>은 말하고 있다.

빛을 누그러뜨려 세속과 하나 되다

겸괘의 ‘지중유산’과 함께 떠오르는 다른 구절이 있다. 노자 <도덕경>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이다. “강렬한 빛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세속의 티끌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읽는 이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율곡 이이는 그 의미를 “덕과 아름다움을 속에 품어, 스스로 빛내거나 남들과 특이하게 다름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세속을 좇아 잘못된 것을 익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속을 떠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화광동진’의 의미를 유교식으로 풀어보자면 <중용>에서 말하는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과 만날 듯하다. “식견은 지극히 높고 밝기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행위는 일상적이고 평상스럽게 한다”라는 뜻이다. 식견은 고명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의 표출과 실행 방식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 알맞게 해야 한다.

<중용>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가 배워야 할 본보기가 하늘과 땅의 성능(性能)이라고 한다. 드높은 식견은 하늘에 비견되고 두터운 덕은 땅과 짝한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자연은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잠시 잠깐도 쉰 적이 없이 정확하게 운행하며 모든 생명을 길러왔다. 하늘과 땅의 이러한 공덕을 ‘지성무식’(至誠無息) 즉 ‘지극한 성실함이 쉬임없다’라고 한다. 하늘과 땅의 진실함과 성실함이 아니라면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중용>은 성(誠)이야말로 ‘사물의 끝과 시작’이며, ‘성(誠)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不誠無物)’라고 말한다. 그러니 높은 덕과 아름다움을 속에 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은 성(誠)하려는 노력에 달린 것이다. 다시 말해 겸손에는 성(誠)이 전제된다는 뜻이다.

<주역>의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에서는 강한 양을 쓸 때 그 강함을 드러내지 말고 부드럽게 써야 하며, 부드러운 방식으로 대처할 때에 그 속에는 곧고 단단함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중유산’의 겸손함은 건·곤괘에서 이미 알려준 지혜와 다르지 않다.

한때 겸손할 수 있어도 끝까지 겸손으로 마치기는 어려운 일이다. 퇴계 이황의 임종 때 점괘인 겸괘 구삼효(九三爻) “공로가 있어도 겸손하니(勞謙), 군자가 끝마침이 있어서 길하다”는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절대적 성실성이 유구하게 지속되듯이, 사람 역시 지극한 정성이라야 겸손으로 끝을 마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부드러움 속에 온축된 단단함’일 것이다.

가득 차 있어도 비어있는 듯

우리는 종종 “사람은 속이 잘 영글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차 있으면서 비어있는 듯한 사람,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공자의 제자 안회이다. 그는 공자의 통곡을 뒤로 하고 서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여의었다. 그와 함께 공부한 증삼은 훗날 안회를 이렇게 회고했다. “재주가 많으면서도 재주가 적은 이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도 적게 아는 이에게 물었다. 가졌어도 없는 듯하고, 가득해도 비어있는 듯하며, 남이 내게 잘못 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예전의 내 친구 안회가 그렇게 했었다.”

남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늘 낮은 자리에 머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살아있을 때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자취가 남는다. 참으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는 벗의 사귐, 사람의 향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립고 소망스럽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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