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배턴 걸(Baton Girl)의 비밀

■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놀라웠다. 작품을 위해 20년 동안 사진을 모았다니.
20년이면 175200시간이고 1040주이며 7300일이고 240개월이다. 어떤 작품이기에 이토록 사진 수집에 오랜 공을 들였을까. 호기심이 커지며 눈에 작품이 안 들어올 리 만무하다. 나는 빅 무니즈(Vik Muniz, 1961~)가 작업한 '배턴 걸(Baton Girl, 2014)'을 다시 관조(觀照) 해 보았다.
브라질 상파울루 출신인 빅 무니즈는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사진작가다. 철사, 먼지, 폐기물, 모래, 설탕 등 일상의 소재를 활용해 작업한다. 브라질의 피카소라 불리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설탕 아이들(Sugar Children, 1997)'. 주인공인 아이들은 서인도 제도 동부의 영국령 세인트 키츠 섬에 있는 설탕 농장의 노동자들이다. 빅 무니즈는 이 작품을 검은 종이 위에 오직 설탕만 뿌려 작업하였다. 사탕수수 밭에서 아이들의 고통으로 탄생한 달콤한 그 설탕으로 말이다. 겉보기에 작품은 아이들이 밝게 웃는 초상이지만 그 이면에는 아이들이 평생을 사탕수수 자르는 일에 시달려야 하는 노예 노동의 현실을 담고 있다.

최근 전시에서 만난 그의 작품 '배턴 걸(Baton Girl, 2014)'에서는 개개인의 다양한 순간들이 보이는 듯했다. 멀리서 보면 치어리딩 소녀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러 사진들이 담긴 '콜라주'이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를 보다의 저자 양민영은 콜라주를 이렇게 설명한다. 콜라주(collage)는 작은 물체나 종이, 잡지 등을 붙이는 기법이다. 콜라주의 일종인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는 '종이를 풀로 붙인다'라는 뜻으로, 주로 신문이나 광고 전단과 악보 등을 붙인다. 이 방식을 처음 미술에 도입한 사람은 피카소와 브라크. 이들은 화폭에 일상성과 현실감을 불어넣고 싶어 했다. 이 시기에 피카소가 썼던 기법이 파피에 콜레다. 피카소, 브라크 등과 함께 입체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스페인 화가 후안 그리스 역시 파피에 콜레 작품을 남겼다. 파피에 콜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소재는 종이다.
이런 기법에서 빅 무니즈가 적극 사용한 소재는 자신이 20여 년 동안 수집한 수천 장의 흑백 사진이다. 사진에는 잡은 물고기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아버지, 카우보이 복장을 한 어린 소년 등 누군가의 다양한 기억 파편들이 담겼다. 더불어 이 작품은 빅 무니즈의 '앨범' 연작이다. 앨범 연작에서 작가는 삶이 기록된 개별 사진들을 한데 모아서, 가족 앨범에서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를 해왔다. 배턴 걸도 현실을 담고 있는 일상 사진들로 꾸며졌고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가 되었다.

참고로 빅 무니즈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다큐영화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 2014)’를 추천한다. 이 영화는 세계 최대의 쓰레기 매립지인 브라질 '자르딤 그라마초'의 최극빈층인 카타도르(catador, 재활용 줍는 사람들)들과 함께 ‘쓰레기로 만든 작품(Pictures of Garbage)’을 완성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 소개에 따르면, 사진작가인 빅 무니즈는 카타도르들이 수거한 재활용 쓰레기를 재료로 삼아 이들을 모델로 한 작품을 기획한다. 이를 통해 예술과 인문학적인 가치를 만들어내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카타도르들에게 변화를 주고 싶어 한다. 빅 무니즈는 2년간 카타도르들과 함께 생활하고 소통하면서 재활용 쓰레기를 활용해 카타도르의 초상이 담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예술 작업을 하게 된 카타도르들은 작업이 진행될수록 잊었던 꿈과 희망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찾게 된다. 이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쓰레기로 만든 작품'은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작품은 영국 런던 미술품 경매장에서 고가에 팔리고, 무니즈는 이 돈을 카타도르를 위해 기부한다.
이렇듯 빅 무니즈는 다양한 계층의 일상에 주목했다면 알렉스 카츠(Alex Katz, 미국, 1927~)는 일상의 단순화에 주목하고 있다. 96세 노장인 알렉스 카츠는 세계 10대 화가로 불리는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미국 뉴욕 출신인 그는 7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화, 드로잉, 조각, 판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알렉스 카츠를 애정한다는 지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현재 그는 서울의 한 갤러리 대표다.
"카츠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어요."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알렉스 카츠의 작품.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96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젊은 감각이 돋보여요."
그렇다면 나는?
'본질'
이 두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아련한 향수와 젊은 감각도 느껴졌지만 말이다. 사실 알렉스 카츠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건 작년 봄(2022년 3월)이었다. '반향'이란 작품이었다. 맑은 물에 비친 초목을 그린 것이었는데 물에 비친 나무의 모습은 없었다. 찰나의 순간을 담았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데 그래서인지 풍경화이지만 추상적인 분위기도 살아있었다. 이렇듯 묘한 느낌을 주는 알렉스 카츠의 반향은 빛에 따라 사물의 온전한 색이 달라지는 빛나는 찰나(본질)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작에도 본질은 존재한다. 노란 미나리아재비(Yellow Buttercups,2021), 노란 창포꽃(Yellow Flags,2021), 엘리자베스(Elizabeth,2010) 작품을 보자. 인물과 꽃, 풍경 등 자신이 사랑하는 일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단순화했다. 거대한 캔버스에 두 얼굴을 배치하는 구성, 얇고 납작하게 처리한 바탕색, 평평한 판에 그린 형태의 윤곽선을 따라 잘라내는 등 카츠만의 조형언어(화풍)를 구축하고 있다. 절제된 색채와 화면 구성을 통해 알렉스 카츠는 현재에만 존재하는 본질을 단순화한 건 아니었을까.

알렉스 카츠와 빅 무니즈를 포함한 유명 작가들의 전시 '정물 도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데이비드 살레(David Salle), 조나스 우드(Jonas Wood), 장 뒤뷔페(Jean Dubuffet), 탐 웨셀만(Tom Wesselmann) 등 해외 작가와 김병호, 권용래, 이기봉 등 국내외 작가 19명의 작품 44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도시를 구성하는 정물과 공존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작품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결국 당신도 나처럼 분명히 작품을 관조(觀照) 하게 될 것이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장소는 세화미술관. 화~일요일 10:00~18:00(월요일 휴관)
(사진 제공 / 태광그룹 세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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