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장애인이 왜 생겼을까?
이면엔 정책적 배려 역설…韓 제도·현실 괴리 좁혀야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선인들의 지혜를 전하는 전통 종교나 사상이 모두 인생은 고해일 뿐이라고 말한다. 순간순간 행복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생각지 못한 더 큰 파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바다에 나갈 때 신체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겠는가? 그런 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가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나라 청년들은 모두 죽을힘을 다해 입시와 취직을 위해 매진하며 살고 있다. 이 삼엄한 경쟁의 경기장 안에 장애인들을 배려한다고 설치한 특별한 전용로가 있다면 오히려 비장애인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만도 하다.
그럼 옛날 사람들은 장애인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과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럼 지혜롭고 전능한 신들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이 세상에 왜 장애인들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이야기로 ‘엔키와 닌막’이라는 신화가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신들도 처음으로 태어났고, 나이 많고 높은 신들은 감독을 하고 젊고 지위가 낮은 신들은 수로를 파고 진흙을 퍼내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고된 노동을 견딜 수 없었던 신들은 지혜의 신이며 창조주인 엔키 신의 집을 찾아가서 불평을 했다. 궁전 깊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마지못해 일어난 엔키 신은 그 말을 듣고 인간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머니 여신들이 점토를 잘 빚어서 인간 모습으로 만들면 그것이 생명을 얻어서 신들의 노동을 대신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물론 엔키 신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신들은 모두 이 일을 흡족하게 여겼고 함께 모여서 술잔을 나누고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다들 거나하게 취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닌막 여신이 엔키 신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엔키 신이 정말 지혜의 신이라면 자기가 만드는 인간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 신은 내기를 시작했고, 닌막이 팔을 뻗고 접지 못하는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자 엔키는 왕의 신하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관리들이 항상 손을 뻗어 세금을 걷어가는 모습을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닌막은 또 눈으로 빛을 볼 수 없는 인간을 만들었고, 엔키는 그가 궁전에서 악사로 일하게 하였다. 닌막이 발이 부러진 인간을 만들자 엔키는 은으로 장식품을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닌막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만들자 엔키는 왕비의 궁전에서 일하게 해주었다. 닌막이 성기가 없는 인간을 만들자 엔키는 왕의 내시로 삼았다. 이번에는 엔키 차례가 되어 머리에 병이 나고 눈을 보지 못하고 목이 부러지고 숨도 잘 쉬지 못하고 갈비뼈가 어그러지고 심장에 병이 들고 장기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만들었다. 닌막 여신이 그 사람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포기하였고 엔키 신이 내기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이다.
‘엔키와 닌막’ 신화는 결국 신들이 술을 마시고 내기를 벌이다가 장애인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현대 독자가 읽기에는 장애인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이들을 조롱하는 것 같아서 거북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이 신화의 주제와 상관없이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닌막이 지어낸 장애인들이 자기 몫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왕궁이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인간을 처음 만드는 자리인데 이미 왕궁이 있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 신화의 저자는 왕이 제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 왕궁이 장애인들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하고 떳떳하게 자기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엔키 신이 직접 이런 제도를 창조했다고 말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운영해야 할 종교적인 의무가 있다고 간접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러서 우리는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나 장애인들도 인권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에는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장애인차별금지법, 그리고 국가인권법을 통해 장애인들이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별 장애인 출현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전체 인구의 5.4%인데 OECD 평균 출현율은 24.1%라서 제도와 현실 사이의 온도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정말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보다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려면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자립생활을 하며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개인의 인식 전환에서 시작하지만 정책적 노력이 있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