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만요? 잠깐이라도 불꽃이 보였다면 만족합니다”
“전대만요? 하하핫…, 과분한 별명이죠. 슬램덩크는 농구 팬들에게 단순한 농구 만화가 아니잖아요. 뭐랄까, 한명 한명이 해당 포지션의 아이콘과도 같은 느낌? 슈터로 따지면 해남의 신준섭과 북산의 정대만이 유명한데 인기는 정대만이 훨씬 좋았지않나싶어요. 저도 좋아하는 캐릭터고요. 그런 선수를 무려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별명으로 만들어준 팬들의 창의성에 놀랐고요. 더불어 불꽃 남자로 비교됐다는 것 자체로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합니다.”
현재 명지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있는 전정규(40‧187cm) 코치는 '전대만'이라는 별명이 지금도 쑥스럽다고 한다. 누구나 자랑스러워 할만한 멋진 별명이기는 하지만 좀 더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분이 크다. 스스로에게는 아쉽고 팬들에게는 미안하다고 밝히고 있다.
프로농구가 시작되고나서 연세대 출신 슈터들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문경은을 필두로 우지원, 김훈 등이 각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가운데 조상현, 방성윤 등이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되어 좋은 활약을 펼쳤다. 짧은 주기를 바탕으로 연세대 출신 슈터들은 꾸준히 배출되고 있었고 리그에서도 검증된 활약을 펼쳤다.
‘연세대 출신 슈터는 믿고 쓸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때문에 2006년 1순위 전정규 역시 그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재능도 충분해 보였다. 농구대잔치에서 MVP를 수상하기도 했으며 연세대 주장으로서 양희종, 김태술 등 후배들을 잘 이끌면서 리더십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정규는 커리어 내내 1순위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박성진, 박준영, 박정현 등과 함께 ‘아쉬운 1순위’를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이름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1순위로 지명된 것 자체는 지극히 기분좋은 일이였겠으나 역으로 평가절하의 원인이 되버린 부분도 있다.
전정규는 장단점이 뚜렷한 슈터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타입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단점이 장점마저 덮어버린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전정규는 연세대 재학 시절 슈팅력 하나 만큼은 제대로 인정받았던 선수다. 슛터의 필수조건인 두둑한 배짱은 물론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봇물처럼 슛을 쏟아낼 수 있는 폭발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슈팅력만 놓고보면 전정규는 상당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는 아주 크지는 않았으나 팀내에서 장신자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중학교 때까지 센터 포지션을 맡았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포지션별 분업화가 뚜렷했던 시절인지라 센터는 철저히 골밑플레이 위주로 움직여야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빅맨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경쟁력은 신장이다.
아쉽게도 중3을 기점으로 전정규의 키는 성장을 멈춰갔다. 전정규는 고민에 빠졌다. 결국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부랴부랴 포워드로 포지션 변경을 했으며 이전까지 낯설었던 외곽슛 연습도 하게됐다. 어찌보면 꽤 늦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전정규는 해냈다. 고등학교 3년 사이에 슛을 장착한 것도 모자라 전국구 슈터 소리까지 들으며 연세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슈팅 천재’라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의 재능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스피드, 볼핸들링, 시야, 패싱센스 등 슛 외의 부분에 대한 지적의 목소리가 컸다. 조성원의 스피드, 김병철의 드라이브인 등 사이즈에서 아쉬운 슛터가 경쟁력을 키우기위해서는 슛외에 다른 무기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전정규에게는 슛이 안터지는 상황에서도 공헌도를 이어갈 수 있는 제2의 옵션이 부족했다.
승부처에서 한방 꽂아주는 능력이야 나무랄 데 없었지만 수비가 불안해 자신이 올린 득점 이상을 허용하기 일쑤였고 슛이 안 터지는 날은 활약상이 뚝뚝 떨어졌다. 만약 다른 무기가 있었다면 슛감을 다시 잡기까지 코트에서 버티는게 가능했겠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있지 못했던지라 슈팅이 부진하다 싶으면 금세 교체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 역시 편하게 플레이하기는 쉽지않았을 것이다.
“선수 시절 제 장단점이야 저도 잘알고있습니다. 말씀주신데로 위력적인 다른 옵션이 있었거나 기동성, 운동능력까지 함께했다면 더 좋은 활약이 가능했겠죠. 하지만 그동안 해온 플레이스타일이 있는 것인지라 마음대로 안되잖아요. 신체능력이야 어떻게 바꿀 수 없는 것이고, 패스 등 다른 플레이도 노력은 했지만 원하는 수준까지는 좀처럼 닿지않더라고요. 결국 제가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최대한 장점을 살리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전정규는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선수시절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모두 경험해본 만큼 여러 상황에 놓인 선수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 되도록 비슷한 눈높이에서 소통하고자하고, 못하는 부분에 스트레스 받게 하기보다는 잘하는 부분을 찾아 발전시키는 지도자가 되고싶다고한다. 전대만의 농구인생은 현재 진행형이다.
◆ 전정규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476경기 출전 평균 5.8득점, 1.6리바운드, 1어시스트, 0.7스틸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06년 12월 17일 대구 오리온스전 = 35득점(3점슛 7개, 3점슛 성공률 58.3%) / 3점슛 성공 ☞ 2008년 3월 22일 안양 KT&G전 = 8개 / 스틸 ☞ 2008년 12월 19일 서울 삼성전 = 6개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현재 명지중학교에서 코치로 있습니다. 현장에서 농구가르치는 지도자들은 다 비슷할거에요. 아이들 지도하고 이것저것 신경쓰다보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갔지 할정도로 하루가 짧을 때도 많아요. 어떤 면에서는 현역 시절보다 더 바쁘죠. 선수때야 나만 잘 챙기면 됐지만 지도자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플레이는 물론 성향에 대해서도 알아야하고 때론 많은 대화나 소통 등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부족한 편인데, 조금씩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스스로 성장해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주희정 고려대 감독님, 전형수 명지고 감독님 등 주변에 좋은 선배님들이 계셔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는중입니다.
Q.엄격한 시절 농구를 배웠던 사람으로서, 내가 배우지않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는게 쉽지않을 듯 싶어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잖아요. 정말 많은 다수의 지도자들이 비슷한 입장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선배님들도 그렇고 저희 때도 그랬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에는 무척 엄격한 시대였죠.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폭력, 폭언 등도 적지않았고 무엇보다 시키는 것은 무조건 따라야 했습니다. 선수 개인의 개성이나 생각 그런 것들이 존중받지못하는 시대였잖아요. 물론 저희들은 그게 당연한줄 알고 지내왔지만 나중에 선수 생활하고 이런저런 것을 겪어가면서 흐름에 맞게 바뀌었죠. 이제는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설사 지도자가 예전 방식으로 가르치고 싶어도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을걸요. 그들이 살아온 세상이 있는데 아무리 운동이라도해도 너무 차이가 크면 받아들이기 어렵잖아요. 저는 별다를게 없는 지도자에요. 되도록 아이들과 많은 소통을 하면서 장단점을 찾아주고, 농구에 대해 즐거운 기억을 가져가면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역할? 딱 그 정도가 현재 바라는 길인데 여전히 쉽지않네요. 제가 선배 지도자들을 대단하다 여기고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더 많이 배워서 그길을 따라 걷고싶습니다.
Q.혹시 농구하는 자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 한명이 있는데 운동을 시킬 생각은 현재 없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정말 죽자살자 하겠다고 하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제가 운동을 권한다던가 관여하는 식의 일은 하지않으려고요. 아내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운동하면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아요. 인간관계도 좁은 편이고요. 아들은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은 실컷 누리면서 살았으면해요. 물론 이것도 저희 부부의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본인이 걷고싶은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찾아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다 비슷하겠죠.
“중학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1승도 하지못했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어떤 분들보니까 되게 운명적이거나 혹은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구공을 잡게되는 등 드라마틱한 시작 스토리가 있더라고요. 주희정 감독님만해도 마치 드라마나 만화의 한 장면같던데요. 아쉽게도 저는 없습니다.(웃음) 초등학교때 농구부 형들이 추리닝을 입고 돌아다녔어요. 가슴에 크게 박혀있는 농구공 그림이 그렇게 멋있어보이더라고요. 저희 학교같은 경우 잘나가는 팀은 아니었어요. 성적도 그저그렇고 농구부원도 많지않았죠. 그래서 종종 학생들에게 ‘농구 한번 해볼래?’라고 권하고는 했는데, 문득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가서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알아서 해’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때 시작하게 됐죠. 선생님의 말씀에 제가 처음에 싫다고하던가 엄마가 반대를 하던가해야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너무 밋밋하죠? 하하핫.
Q.처음부터 슈터 역할을 맡았을까요?
전혀 아니에요. 저의 학창시절에서 슈터 역할은 아주 나중에 가서야 인연이 되었답니다. 한동안은 쭉 센터를 맡았던 나름 빅맨 출신입니다.(웃음) 웃픈 사실은 별로 큰키도 아니였는데 당시 팀에서는 가장 컸던 관계로 센터를 하게됐어요. 그리고 중학교를 올라갔는데 거기서도 같은 상황이었던지라 역시 또 센터를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중학교 3학년 이후로는 키가 거의 크지않았어요.
Q.학창 시절에 잘했던 또래들로는 누가 있었을까요? 전국적으로 소문난 친구들있잖아요.
음…, 당시에 저희 학년에서 유명했던 선수들로는 허효진, 김학섭 등이 가장 먼저 생각나네요. 효진이는 운동신경이 정말 대단했어요. 어지간한 친구들은 할 수 없었던 동작이나 기술을 아주 쉽게했어요. 개인기도 좋아서 일대일로는 막아내는 선수가 거의 없었던 듯 싶어요. 학섭이도 ‘천재 가드’로 명성이 높았죠. 시야가 넓고 패스가 기가막혔는데 당시에 이미 또래들 수준은 가볍게 넘어서지않았나 싶습니다.
Q.중학교 시절, 팀 성적은 어땠나요?
솔직히 말씀드릴께요. 최악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내내 전국 대회에서 1승도 못했으니까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요. 그냥 저를 포함해 개개인이 모두 못했고 그로인해 전력은 바닥을 쳤고 당연히 성적이 나올 수가 없죠. 물론 나름대로 노력은 했어요. 운동하는 친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승부욕이 강해요.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 높더라고요. 그냥 진 것도 아니에요. 앞서 언급한 효진이야 워낙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았고 노경석이라는 친구도 부산 쪽에서는 알아줬거든요. 이런 친구들이 이끄는 학교를 만나면 그야말로 대패를 당했어요. 전반전에만 점수차이가 30-3 막이랬으니까요. 상대팀에서 10골도 넘게 넣을 때 저희는 한두골 넣고 그랬다고보면 됩니다.
Q.헛! 조금 심한데요?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하지만 현실이 그랬어요. 그만큼 전국대회에 나오는 팀들과의 전력차이가 심했어요. 때문에 ‘과연 농구를 계속해야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커졌던 시기였습니다. 어떻게 견디어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아무리 강팀과 약팀이 공존한다지만 저렇게 점수차이가 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거든요. 마치 중학교팀과 초등학교팀의 시합같았습니다. 화가 나는 것을 떠나 절망감, 허무함, 자괴감 등등 어린나이였지만 별의별 감정을 다 느껴지던 시기였어요. 물론 저도 남탓, 주변 탓할 입장은 아니었죠. 전반전에 1~2점 기록하는 주전 센터가 바로 저였으니까요. 현실이 이러니 기적을 바랄 수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상대가 넣은 점수의 반절 정도로는 따라붙어야 뭔가를 기대해도 기대할 것 아니에요.
Q.그정도 성적으로는 농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를 가기도 쉽지않았을 듯 싶어요.
어려웠죠. 단순히 1승도 못거둔 것도 문제였지만 경기 내용은 더 최악이었으니까요. 키도 크지않아서 포지션 문제도 있었고 어찌해야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희 지역 오산에서는 올라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없었고 그나마 주변에 삼일상고가 있었지만 경쟁이 심했죠. 중학교때 성적으로는 솔직히 답이 안나왔습니다. 선배중에는 오산 출신들이 꽤 있었어요. 김성철, 강혁, 정락영, 김광운 등…, 다들 삼일상고로 가셨죠.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광주고등학교에서 포워드로 키워주겠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유학(?)을 가게됐습니다.
Q.가면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가면서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하는 친구들도 다음 단계에서 잘풀리지않는 경우가 태반인데, 중학교 시절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무리 농구를 하기 위해서라지만 멀리까지가서 고등학교를 다니는게 옳은 선택일까? 싶은 생각도들었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Q.어쨌거나 장기인 3점슛은 광주고로 가서야 던지게 된 것이네요?
그렇죠. 그때부터가 3점슛의 시작이었죠. 처음에는 힘이 안되서 3점슛을 던진다는 자체가 힘이 들었습니다. 정확성은 둘째치고 해당 거리까지 공이 날아가는게 첫 번째라서 억지로 힘을 줘서 던지기 일쑤였습니다. 1학년 내내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의 운동부 환경 역시 개인적으로는 도움이 된 부분도 있어요. 지금은 운동부도 학업을 병행한다고 하던데 그때는 새벽, 아침, 낮, 야간에 걸쳐서 하루종일 훈련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주구장창 슛을 던졌고 또 던졌습니다. 특히나 저같은 경우는 숙소생활을 하다보니 오롯이 농구에만 집중하는게 가능했죠. 농구 외에 뭘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많은 훈련량을 가져갔고 그로인해 고등학교 3년동안에 슛을 장착하는게 가능했지않나 싶어요.
Q.다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왜 없었겠어요. 한번도 그런 생각이 안들었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타지까지 내려와서 농구하고있고 부모님도 멀리서 고생하시는데 포기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불어 늘 힘들고 지치기만한 것은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농구부도 사람사는 곳인데 소소한 일상의 재미도 있었습니다. 특히 먹을 것에 대한 추억이 많네요. 한창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나이잖아요. 더군다나 하루종일 운동까지하는 상황이었으니 뭔가를 먹고 돌아서도 바로 배고프던 시절이었죠. 일단 밥은 저희끼리 돌아가면서 쌀 씻어서 해먹었어요. 반찬은 부모님들이 가져다주신 것으로 먹고요. 간식같은 경우 지금처럼 시간에 관계없이 치킨, 피자, 족발이 뚝딱뚝딱 배달이 되는 시대도 아니었고, 형편도 다들 좋지않아서 된다고해도 많이 시켜먹지는 못했을 듯 싶어요. 큰 냄비에 라면 10봉씩 끓여서 서로 나눠먹고 그런 것이 간식이었죠. 어쩌다 형들이 치킨하나 사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저에게 1순위는 여러 가지 의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Q.어쨌거나 연세대에 스카웃되어서 진학했을 정도면 고교시절 실력이 부쩍 늘었나봐요?
아주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중학교 때와 비교하면 괄목상대한 발전이었다고 생각해요. 저 개인적으로도 기량이 늘었고, 고3때 전국대회 우승도 차지하는 등 팀 성적도 어느 정도 잘 나왔으니까요. 중학교 3년내내 동네북 신세를 면치못하다가 고등학교 올라와 이기는 경험이 쌓이다보니 개인적으로도 신이 나더라고요. 선수가 성장하기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지만 동기부여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패배가 익숙했던 선수들에게 최고의 동기부여가 뭐였겠어요. 이기는 것이죠. 어쨌거나 고등학교 들어와서 개인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고 연세대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너무 기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Q.당시 연세대 멤버가 쟁쟁했죠?
그럼요. 언제 안좋은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꾸준히 좋은 선수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제때도 역시나 선후배들이 쟁쟁했습니다. ‘연세대를 가는게 맞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나같이 너무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라 제가 뛸 자리가 없어보였거든요. 다행히 운좋게도 감독님께서 기회를 많이주셔서 1학년 때부터 많은 경기를 뛸 수 있었습니다. 선배 형들로는 박광재, 김동욱, 전병석, 방성윤, 이정석, 최승태 그리고 바로 아래 후배들로 양희종, 김태술 등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도 종종 제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느껴져요. 저런 멤버들 속에서 출장시간을 가져갈 수 있었다니…, 정말 아찔합니다. 연세대에 들어가서는 슈팅가드로 뛰었습니다.
Q.키가 늦게 큰 선수들같은 경우 가드-포워드-빅맨 그런식으로 포지션을 변경해나가면서 성장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키가 안커버리는 바람에 역으로 갔어요.
일반인들이야 키가 어느 정도 컸다싶으면 적정선이라는게 있겠지만 농구를 하는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크면 좋은거죠. 신장 욕심없는 선수는 없을거에요. 아마도 키가 꾸준히 컸으면 계속 빅맨을 했거나 아니면 장신 포워드 자원으로 뛰었을 수도 있었겠죠. 저같이 단순한 플레이 스타일의 선수는 빅윙 쪽이 잘 어울렸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키 만큼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그래도 얻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초중학교 시절 센터 경험을 하다보니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나 할까요. 특히 포스트 안쪽의 상황에 대해 일반적인 슈터들보다는 더 잘 알수 있었지않나싶어요.
Q.연세대 졸업반 시절, 상당한 리더십을 가진 선배였다고 들었어요.
글쎄요. 말씀을 듣고나서도 제가 리더십이 있는 스타일이었나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저희 학년에 저밖에 없다보니 선배 노릇은 할려고 노력했지만 개인적인 리더십보다는 당시 선수단 분위기가 워낙 좋았어요. 하고자하는 의지도 강했고 서로서로 존중하고 응원해주는 문화가 있었다고 할까요. 좋은 후배들이 잘 따라주니까 저는 묻어갔을 뿐인데 그것을 좋게 봐준 분들이 또 있었나봐요. 저는 강성, 카리스마 그런쪽은 아니에요. 서로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주자는 쪽인데 당시 연세대 분위기와 잘맞은 듯 싶어요.
Q.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뽑혔는데 어느 정도 예상했나요?
저희 학번이 이전에 비해서 조금 약하다는 얘기는 많이 있었죠. 그런 가운데 각종 매체에서 순위 예상을 할 때 1순위로 저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기대는 가졌습니다. 골짜기 세대니 어쩌니해도 1순위가 가지는 상징성은 상당히 크잖아요. 1순위에 지명된 후 만감이 교차했어요. 중학교 때까지 팀성적, 개인성적 모두 최악이었고 고등학교 들어가서 슈터로 전향해서 대학시절 쟁쟁한 선후배들 사이에서 살아남기까지…, 여러순간들이 떠오르더라고요. 농구는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제 이름앞에 ‘1’이 붙는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Q.1순위 지명까지는 좋았는데, 이후 활약이 1순위로서 미흡하다는 평가 속에서 ‘아쉬운 1순위’로 기억되고있어요.
그렇죠. 더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지명순위에 비해서는 이래저래 미흡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살짝 핑계를 대자면 디스크를 달고살아서 고질적인 허리통증에 시달렸어요. 심할 때는 일상생활도 쉽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프로선수 생활하면서 크고작은 부상안가지고있는 선수가 누가 있었겠냐 싶기도하고…, 어찌보면 핑계죠. 인터넷 세상이잖아요. 당시 저에대한 팬심은 알고있었어요. 혹평에 부담도 느끼고 멘탈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기대치가 컸다는 것이고 팬분들께는 지금까지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 농구는 ㅇㅇ과 ㅇ입니다”
Q.‘전대만’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어요.
어휴…, 무려 슬램덩크 캐릭터 정대만에 빗댄 것이잖아요. 너무 감사하고 황송했죠. 슬램덩크는 고교농구를 배경으로하고 있지만 실상 캐릭터 하나하나가 가지고있는 상징성이 매우 크잖아요. 그 가상 세계 속에서 슈터하면 신준섭, 정대만이 대표적인데 폭발력이라던지 스토리가 더해져 인기는 정대만 쪽이 훨씬 좋죠. 주인공과 같은 팀 북산이기도하고요. 그런 정대만을 성까지 바꿔서 별명으로 불러줬는데 저로서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정대만같이 경기의 흐름을 바꿔버리는 모습을 자주보여드렸어야하는데…,(웃음)
Q.슈팅능력 자체는 좋은데 운동능력, 스피드 등에서의 아쉬움을 지적받기도 했어요.
그렇죠. 농구에서 슈터는 단지 서서 슛만 던지는 것이 아닌 자신을 막으려는 수비를 따돌리고 공격을 성공시켜야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운동능력, 스피드 등이 좋으면 엄청 유리하겠죠. 저같은 경우는 그런 쪽에서 타고난 장점같은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장이 월등하게 큰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아쉬움이 컸죠. 풀업 3점슛보다 캐치 앤 슛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Q.수비를 얼마나 잘 제칠 수 있느냐도 슈터의 능력을 가늠하는 요소잖아요. 현역 시절 어떤 식으로 수비를 떨구셨을까요?
볼없는 움직임을 많이 가져가면서 부지런히 빈공간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주로 양쪽 코너를 선호했습니다. 그쪽에서의 슈팅에 자신감도 있었지만 뛰다보면 코너에서 찬스가 많이 나더라고요. 아마도 제가 코너쪽 빈공간을 유달리 잘 찾아내지않나 싶기도해요. 물론 제가 복잡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져가는 선수도 아니고 볼없이 코너 쪽으로 달려가면 여지없이 수비수가 따라오죠. 제가 스피드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슛타임은 빠른 편이에요. 공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던지는 것이 아닌 잡자마자 올라가는 스타일이라 그런점에서는 수비도 애를 먹지않았을까 싶어요. 정점까지 올라가서 던지는게 정확성은 더 높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많이 찍혔을 것 같기도해요.(웃음) 더불어 빅맨의 스크린을 많이 활용하려고 했죠. 슈터는 스크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슛찬스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거든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사전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하고요.
Q.국내도 그렇지만 NBA에서도 3점슛의 비중이 부쩍 커진 시대잖아요. NBA 등을 보면서 눈에 들어오는 슈터 혹은 3점슛 마스터가 있을까요?
솔직히 예전에는 NBA를 종종 시청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잘 안보고 있어요. 아무래도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프로농구 아니면 아마농구 위주로 보게되네요. 물론 스테판 커리, 클레이 탐슨, 던컨 로빈슨, 데미안 릴라드 이런선수들이 엄청난 3점슛 능력을 보여주고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잘 몰라요. 오히려 예전선수들이 여전히 기억 속에서 익숙하죠. 특히 슈터같은 경우는 레지 밀러가 워낙 유명했잖아요. 밀러타임으로 워낙 유명세를 떨쳐서 친구들끼리 연습경기나 훈련하면서 장난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ㅇㅇ타임’ 그러고 놀았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Q.커리나 릴라드같은 선수보면 공몰고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3점슛을 쏘는가하면 수비수가 거리를 줬다싶으면 주저없이 딥쓰리도 던지잖아요. 그런 플레이도 간혹 했을까요?
아, 저요? 거의 못했다고 보는게 맞죠. 지금이야 잘만 던지면 어느 정도 그런 플레이도 용인해주는 분위기지만 제가 농구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불호령부터 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플레이에 능숙한 슈터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않았죠. 시간에 쫓겨서 한번씩 먼거리에서 던지는 3점슛은 있었는데 그것도 딥쓰리라면 딥쓰리겠네요.(웃음)
Q.은퇴후 3X3농구를 바로 시작했어요.
완전히 저를 불태우고 은퇴한 것도 아니고 힘이 조금 남아있던 상태였어요. 그래서 가지고있던 에너지를 3X3농구에 써보기로 했죠. 새로운 농구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고요. 일부러 찾아서 한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어요. 유소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거기에 3X3팀이 있었고, 저도 참여하게되는 계기가 됐죠. 오래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3X3농구도 만만치않더라고요. 코트가 좁다보니 짧은 시간 안에 왔다갔다해야되는데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짧아서 체력적인 소모도 더 크게 느껴졌어요, 어지간한 몸싸움과 반칙성 플레이는 파울도 잘 안불어주는 등 거의 전쟁터더라고요. 프로출신 선수들도 3X3농구를 쉽게 봤다가는 큰코 다치겠구나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어쨌든 지도자 입장에서는 농구에 관한 것이라면 최대한 많이 경험해보는 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알찬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Q.오늘 인터뷰 너무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정규에게 ‘농구’는 무엇일까요?
저에게 농구는 늘 시작과 끝인 것 같아요. 눈뜨면 농구로 일과가 시작되고 농구공을 내려놓고 체육관을 나서면 하루가 마감되고요. 그러한 부분은 선수 시절이나 지도자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싶네요. 어쩌면 농구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일과가 아닐까 싶기도하고요. 만약 농구와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있었으면 농구공이 너무 그리웠을 듯 싶어요. 어린시절부터 농구와 함께 성장했던만큼 앞으로 세월이 좀더 흘러 노인이 되어서도 농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인생이겠죠. 농구와 함께하는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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