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딸 잃은 아버지의 그 후 30년 [만물상]

김태훈 논설위원 2023. 5. 2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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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소설가 박완서는 작품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 잃은 아픔이 더 컸다고 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중략) 오직 참척(慘慽·자식 사망)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조각상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자식 잃은 아픔은 신도 위로할 수 없기에 그저 불쌍히 여길 뿐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아픔을 큰 사랑으로 승화한 부모들이 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의 부모는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천안함 용사 정범구 병장과 차균석 중사의 어머니들은 보상금을 아들의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서울 서대문의 이진아기념도서관은 평소 책 좋아했던 딸을 사고로 떠나보낸 부모가 세웠다. 성악 하던 아들을 학폭으로 잃은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도 장학회를 만들었다.

▶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영국에선 등교한 아들을 심정지로 떠나보낸 부모가 전국 학교에 심장제세동기 6000여 개를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지난 12년간 6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미국에서 9·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뒤 장학재단을 만들고 공원과 도서관, 테니스장을 조성해 아들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기부한 이도 있다.

▶예술가들도 작품을 통해 비슷한 일을 한다. 가수 에릭 클랩턴은 아들을 추락사로 잃고 방황하다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을 발표했다.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그 노래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강해져야 해/ 그리고 살아가야 해/(중략)/ 나는 네가 있는 이곳, 하늘에 머물 수 없으니까.’ 시인 김현승도 자식을 잃고 시 ‘눈물’을 썼다. 그 슬픔을 꼭 이겨내겠다는 다짐을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라는 시행에 담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한꺼번에 세 딸을 잃은 정광진 변호사가 19일 별세했다. 정 변호사는 생전에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고 했지만 세상을 오래 원망하지 않았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30년 가까이 시각장애 학생들을 지원했다. 눈물 속에 딸들을 보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되살려 냈다. 비극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정 변호사 같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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