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성추행의 구조

한겨레 2023. 5. 2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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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고은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2023년 1월 실천문학사의 고은 시집 출간 소식이 알려졌을 때 최영미 시인은 칼럼을 통해 “싸워야 할 상대가 고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거대한 네트워크, 그를 키운 문단 권력” “작가, 평론가, 교수, 출판사 편집위원, 번역가들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전체”라고 했다. 고은이 먼저 걸고도 한번도 출석하지 않은 민사소송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시인인지 경력과 활동이 길게 열거됐다고 한다. 고은이 저자로 등록된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봤다. 단독 및 공저 포함 200권 이상이다. 현재 팔리고 있는 책은 80권이 넘는다. 이 책을 기획, 제작, 판매해온 출판계 전·현 구성원들은 고은의 성추행, 성희롱을 몰랐을까.

실천문학사는 고은 신간에 대중들이 반발하자 사과하고 유통을 멈추더니 4개월 만에 설문조사를 내놨다. 이런 문항이다. ‘범죄를 저질러 5년간 복역하고 나온 농부가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 ‘그 농부를 도와준 정미소를 압박하는 것이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 답정너 같은 문항에 설문조사라는 이름이 가당치 않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문제는 이런 시도가 성희롱, 성추행의 ‘구조’를 축소하고, 개별적 해프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설문조사는 고은을 ‘농부’에 비유한다. 그러나 실천문학사가 뽑은 2022년 12월 대담집 제목에서 고은은 ‘전 지구적 시인’이다. 한국 문단이 고은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앙해왔음도 상기해본다. 또 설문조사는 ‘5년 복역’을 비유했으나 복역은커녕 최영미 시인 등에게 1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뒤 패소하고도 사과 한번 없었다. 설문조사는 출판사를 ‘농부를 도와준 정미소’에 비유한다. 그러나 출판사는 작가의 입지를 만들고 재생산하는 중요 거점이다.

실천문학사는 ‘출판의 자유권’ ‘출판의 자유 권리 억압 사태’를 현 상황에서의 쟁점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쟁점을 옮기며 출판권리가 훼손되면 안 된다고 주장할수록, 이때 누락되는 성희롱, 성추행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문단에서 유명 작가의 성희롱, 성추행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깨자, 고발자 시인이 도리어 문단의 외면을 받고 고단한 싸움을 하고 있는 현실에 문학 출판계, 출판사는 어떤 성찰을 하고 어떤 재발방지책을 내놓을 것인가. 시민들은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고, 어려운 고민과 답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지난 16일 오후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첫 변론’ 제작발표회 유튜브 생중계 갈무리.

지난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주제로 삼은 다큐멘터리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박 전 시장의 성희롱, 성추행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2021년 발간 책을 원작으로 삼는 다큐다. 책의 저자는 박 전 시장 사건 취재 과정에서 무수한 ‘피해자들’의 사연을 접했다고 한다. 박 전 시장 유족, 서울시에서 근무했던 공무원들이다. 방조 혐의(피해자 고소가 아닌 제3자 고소가 진행된 건)로 경찰 조사를 받은 서울시 정무직들은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라고 개탄했다고 하며,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게 자신의 본분이라고 한다.

성폭력이 드러나기 전까지 가해를 지속하고, 그 대상을 포섭하고 관리하다 피해자가 자신을 피해자로 인지하고 공론화를 시작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집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본다. 서울시장에 의한 비서 성희롱, 성추행 사건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직 책임 있는 응답이 오지 않은 질문이 무수하다. 공무원 임용 3개월 만에 수도사업소에서 시장 비서실로 발탁한 과정은 어떻게 가능했나. 심기를 보좌하는 일을 특정 성별에 준 업무 체계는 누구에 의해 언제부터 만들어졌나. 성찰과 재발방지 계획이 확인되지 않은 채 정당, 정치, 인맥과 네트워크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작동한다. 그 사이에서 핵심인물들을 피해자로 호명하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집겠다는 행위는 성희롱, 성추행의 구조를 보이지 않게 삭제해버린다.

혹시 실천문학사와 박 전 시장 다큐 제작팀의 시도는 새로운 수익 구조로 의도된 것일까. 성희롱, 성추행을 부정하고 성평등 지향을 의심하자고 수요를 창출하는 것일까. 위 두 시도의 홍보 대상이 되신 분이 있다면 적극 거절하고, 반대하고, 제지하시기 권한다. 유엔여성기구(UN Women)가 2017년에 제시한 젠더폭력 예방지침은, 첫째는 가해자의 문제임을 알게 하라, 둘째는 현장에서 말하라다. 성희롱, 성추행의 구조에 연루돼 있는 독자와 시민으로서 나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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