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까지 모두 평등해야 나라 되찾는다 생각하셨죠”

강성만 2023. 5. 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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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백촌 강상호 선생 아들 강인수씨
강인수씨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뒤로 부친 강상호 선생의 사진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올해는 경남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다.

진주의 천석지기 양반가 출신이었던 백촌 강상호(1887~1957) 선생은 1923년 4월24일에 백정공동체 지도자 이학찬·장지필 선생 등과 뜻을 모아 형평사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뜻이 담긴 형평사는 조선 시대에 극심한 신분 차별에 시달리던 백정 해방 운동을 목표로 삼았다.

고기를 잡거나 피혁 제품을 만들던 백정은 1895년 갑오경장으로 법적인 차별에서 벗어났지만 일상 속 차별 악습은 형평 운동이 시작된 1920년대 초까지도 근절되지 않았다. 백정 자녀들은 학교 입학도 허락되지 않았고 백정은 교회에서 다른 신도들과 함께 기도도 드릴 수 없었다.

백촌 등 진주 지역 사회활동가와 백정 당사자 연대로 시작된 형평사는 출범 이후 12년 활동하면서 백정 인권 개선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 호적인 민적에 당시까지 남아 있던 ‘도살’이나 ‘도수업’(짐승을 잡는 직업)이라는 직업 표시를 없앴고 야학이나 강습소를 신설해 백정 자녀들이 교육받을 기회도 크게 넓혔다.

지난 15일 대구 수성구 신매동 자택에서 백촌의 아들 인수(85)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달 25일 진주시가 연 ‘진주 100년 형평 기념식’에서 부친에게 수여된 감사패를 대리로 받았다.

“친일을 하다 해방 뒤 반공투사로 변신한 사람들이 이승만 정부에서 앞장서 독립운동을 했던 죄 없는 사람들을 툭하면 빨갱이로 몰아 죽였어요. 박정희가 죽인 인혁당 사람들도 그렇죠. 아직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어요. 현대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죠.”

부친의 삶을 왜 기억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들이 내놓은 뜻밖의 답이다. 그는 약 15년 전에 부친의 생애를 기록한 책 <은총의 여정-형평운동과 강상호>(비매품)를 출간하고 간간이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이 책을 내는 목적도 “(부친이) 조국과 민족 앞에 추호도 한 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란다.

아들의 바람에는 곡절이 있다. 백촌은 만 20살이던 1907년에 경남 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여해 7개월가량 옥고를 치렀다. 형평운동에 힘을 쏟던 시기에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이 단체 진주 지역 간사를 맡았고 1920년 설립된 노동자 권익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활동도 했다. 이런 항일 활동을 인정받아 해방 이듬해 1월에 결성된 진양(진주) 3·1동지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백촌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좌익 전향자 계도’를 구실로 이승만 정부가 1949년에 만든 보도연맹 명단에 당사자도 모르게 백촌의 이름이 오르면서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4년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6·25가 터진 뒤 진주경찰서의 한 양심적인 경찰이 총살 지령이 내려졌으니 피하라고 연락을 해줘 부친이 목숨은 구할 수 있었죠. 하지만 역시 보도연맹 명단에 있던 숙부(강영호)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어요.” 그의 숙부는 1923년에 소파 방정환 등과 함께 색동회를 창립한 진주 지역의 어린이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였다.

부친이 보도연맹 명단에 오른 경위를 묻자 인수씨는 이렇게 답했다. “누구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친일파 고등계 형사를 하다 해방 후 반공투사가 된 사람의 짓이라고 짐작해요. 부끄러운 과거를 덮으려는 그들에게 초대 3·1동지회 회장을 지낸 부친은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부친 1923년 백정공동체와 ‘형평운동’
멍석말이에 “백정 두목” 비웃음까지
해방 뒤 진양3·1동지회 초대 회장
보도연맹 명단 올라 4년간 ‘도망자’
색동회 창립회원 숙부는 총살당해

92년부터 부친 기념사업 적극 관여
최근 ‘100년 기념식’서 감사패 대리
형평운동 기념공원·기념관 추진
“친일청산·현대사정리 아직도 안돼”

빨갱이로 몰려 진주에 남은 집마저 헐값으로 넘기고 산간에 숨었던 백촌 가족은 옛 형평사 동지들의 지원에 기대어 근근이 연명했단다. 인수씨 역시 고교(옛 진주농림고)는 학교장 주선으로 학비 면제를 받아 마칠 수 있었지만 대학 진학은 돈 때문에 포기했단다. “일제 때 부친이 형평사 등 사회운동에 전념하느라 빚을 져 촉석루 앞 12대문집을 경매로 넘겨야 했는데 해방 뒤에는 빨갱이로 몰려 모친이 패물로 산 진주 봉곡동 기와집마저 잃고 무일푼 신세가 되었죠.”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 백촌이 1923년 백정 해방 운동에 나서자 주변의 질타와 비웃음이 거셌단다. “숙부가 1950년에 총살당하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 숙모가 3년 뒤 별세했을 때 부친과 함께 상가에 가는데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부친을 보고 ‘백정 두목’이라고 한 게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형평운동 초기에는 조부도 부친의 형평운동을 말리며 (부친을) 멍석말이를 해 매질했다고 해요. 물론 나중에는 형평운동은 민족의 힘을 합치는 항일운동이라는 부친의 말에 설득돼 형평 운동을 밀어주셨죠.”

그는 부친이 형평운동에 나선 계기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부친이 1920년 진주에서 백정이 양반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은 사건을 접하고 동포 간의 망국적 인간차별과 분열에 탄식했다고 해요. 백정이 일본인의 차별에 더해 같은 조선인에게도 차별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동포가 모두 평등한 신분이 되어 하나가 되어야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는 “자비보살이라고도 불린 조모의 삶도 부친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도 했다. “1910년대 진주 지역에 큰 홍수와 흉년이 들어 정촌면 가좌리 주민들이 굶주릴 때 조모는 곡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셨어요. 그때 살아남은 주민들이 1917년에 조모를 추모하는 ‘시덕불망비’를 세웠죠.”

백촌이 1957년 별세했을 때 전국에서 옛 형평사원 300여 명이 진주로 집결해 장례를 주관했단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진주에서 그동안 본 가장 큰 장례였다고요. 분향하며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슬피 우는 분들이 많았어요.”

형평운동을 주제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포스터.

중학 시절부터 영어를 잘했던 인수씨는 군 복무를 마치고 공군 군무원으로 일하며 주로 영어 번역을 했고 그 뒤 옛 삼성항공산업주식회사에 특채로 들어가 16년 동안 영어 전문자료 번역과 사내 영어 교육 등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진주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설립된 1992년 무렵부터 부친의 생애를 알리는 데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업회에서 형평운동 관련 강의나 교육, 답사 등 일을 잘하고 있어요. 현재는 형평운동 기념공원 조성과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죠.”

백촌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대통령 표창은 독립 유공자 서훈 중 제일 말단입니다. 투옥 기간이 짧았다는 이유였죠. 그래도 애국지사라는 명분은 세워주어 고맙게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치며 부친 추모를 위해 더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하자 그는 이런 바람을 나타냈다. “형평운동이 알려지면서 진주의 부친 묘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벌초를 자주 해야 하는 데 혼자 힘으로는 쉽지 않아요. 1년에 두 번 하는데 금방 풀이 자라요. 시에서 도움을 주면 고맙겠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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