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민의 글로벌 경제 톡톡 <34>] 원산지 제도라는 국제 경제 룰, 보호주의 위한 교묘한 술수인가

최용민 WTCS 대표 2023. 5. 2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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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표현은 겉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내용보다 작은 규정이나 마무리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글로벌 경제에서 안보가 주요 이슈로 등장하면서 모두가 경제 회생과 일자리를 내세우지만, 디테일로 눈을 옮기면 이기주의로 초점이 모아진다. 우리 제품만 가능하고 여타 제품에는 혜택을 배제하겠다고 말한다. 특히 경제 체질 강화와 경제 안보를 말하면서 보이지 않는 구석에 타국 제품을 배제하는 위장된 조항을 끼워 넣는다. 심지어는 목적은 친환경과 공정한 룰이라고 설명을 달고 세상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높은 장벽을 내세워 그린(green)과 국제 룰을 적대시한다.

이런 차별과 교묘한 술수는 원산지표시제도(certificate of origin)를 통해 시현된다. 원산지표시제도는 원래 소비자에게 정확한 생산지 정보를 제공하고 저개발국 수입품과 국산품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는 선량한 의미에서 출발했다. 생산지를 쉽게 알 수 있는 과실이나 곡물을 제외하고는 원산지를 표시하는 규정은 매우 복잡하다. 오늘날과 같이 국제적 분업 구조를 통한 생산방식이 일상화되면서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가 언급될 정도로 복잡함을 넘어 난수표에 가깝다.

이 효과는 국가별로 원산지 규정이나 통관절차가 실타래처럼 난해하게 얽혀있어 실질적으로 외국산 수입을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극단적으로 협업을 한다면서 매우 까다로운 원산지 규정을 내걸어 그 의도에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최용민 WTCS 대표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 통상연구실장·베이징 지부장·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美 인플레이션 감축법

한미 간에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이중으로 악마의 디테일을 품고 있다. 이 법안은 미국이 자국 내 친환경 에너지 공급망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 약 480조원을 쏟아붓겠다는 내용으로 2022년 8월 7일(현지시각)에 법안이 미국 상원을 통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발효됐다. 비밀작전처럼 진행된 이 법안은 목적과 제목을 보면 외국인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다. 친환경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중산층 복원을 위해 돈을 쓰겠다는데 누가 비난하겠는가. 특히 친환경 차량에 대해 최대 7500달러(약 990만원)의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한다는 조항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법안의 세부 실행 계획인 원산지 규정을 살펴보면 법안의 제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산 제품으로 인정받아야 혜택이 돌아가는데 자국에서 생산된 원재료 및 부품 비중(원산지 기준)이 지난해 10월 말부터 60%로 상향되며, 2024년에는 65%로 더 높아진다. 2029년에는 75%로 한층 강화해 많은 세제 및 자금 혜택을 준다고 발표했지만, 외국산 부품을 사용한 제품에는 그림의 떡으로 만들었다. 또 동법안은 미국산이면서 미국 내 노조가 있는 기업이 생산한 전기차에는 대당 4500달러(약 590만원)의 추가 세액공제를 제공한다는 최고 수준의 디테일을 숨겨 놨다.

일반인이 원산지 규정을 보고 ‘미국에서 일부 부품을 조달하면 되겠네’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통상 원산지 역내 비중이 40%를 넘으면 기업이 이를 충족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비중은 전체 제품 구성에 필요한 부품의 가격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조달된 부품의 비중이 40%가 넘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최적의 조달 구조를 짜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60%로 높인다는 것은 도달하기 힘든 고난도 작업이다.

기계 부품을 예로 들면 미국 내 부품을 새로 쓰려면 현지 업체와 새로 연구개발을 하고 시제품을 만든 후에 성능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어 제품 양산 설비(공장)를 갖추는 절차가 필요해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물량을 감안할 때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힘든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산 원산지 비중이 최대 75%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기준의 상향’이지만 사실상 수입 금지에 해당한다는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실제로는 외국산 부품이나 제품을 배제해 원가를 높이는 데 작용(비싼 미국산 부품을 사용해야 하므로)해 인플레이션을 촉진(?)하는 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미국이 원산지 제도를 통해 초강경 조처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 7월에 발효된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USMCA·US-Mexico-Canada Agreement)의 원산지 기준을 보면 세 나라가 합법적으로 담합(?)한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협정 이름은 자유무역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제로 여타국에 무역 제한으로 작용한다. 승용차 및 경형 트럭은 전체 부가가치(가격) 기준으로 75% 이상을 USMCA 역내에서 발생(조달)해야 관세를 면제하겠다고 못 박고 있다.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는 USMCA 원산지 규정상 핵심 부품으로 분류돼 역내 생산 부품 비율 75∼85%라는 허들을 넘어서야 한다.

친환경차에 대한 세액혜택 기준을 북미 내 최종 조립 요건,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 조달 등으로 매우 엄격하게 규정해 원가나 효율성 면에서 경쟁력이 없는 부품 사용을 강제해 환경 지킴이에 역행하는 조처를 했다는 비난을 해도 반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래서 점잖게 표현하면 ‘역내 부품 조달 강화’지만 실제 무역 현장에서는 ‘자국 생산주의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원산지 장벽을 뛰어넘을 비책 강구해야

원산지 기준을 통해 상대국을 곤경에 빠뜨리는 제도는 이제 유럽연합(EU)에도 상륙할 태세다. EU는 최근 기업의 공급망 내 인권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사 의무와 위반 시 제재 내용을 담은 ‘EU 공급망실사지침(안)’을 발표했다. 그 목적은 그린딜, 탄소 감축, 지속 가능성 등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어 대외 명분을 얻기에 충분하다. 인권과 환경보호라는데 누가 반대 입장을 취하겠는가.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외국기업을 합법적으로 홀대하려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EU 의회와 이사회가 본지침을 채택하게 되면, EU 각 회원국은 2년이라는 국내법 전환 기간 후 동법안을 시행하게 되는데 의무 위반 기업에 특정 행위 중단 명령, 임시 조치 명령, 금전적 제재를 가할 수 있고 민사 책임까지 부과할 정도로 강력하다. 주로 배터리, 태양광, 연료전지, 드론 등을 생산하거나 수출하는 기업이 주 타깃으로 EU발 또 다른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공급망실사법을 이미 시행 중인 프랑스에서는 인권·환경·지역사회 단체가 개발도상국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의 인권침해, 불공정 거래, 생태계 파괴 등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광물의 채굴 및 제련 과정에서 인권과 환경침해가 있는 국가로부터 원자재 조달을 금하는 내용이 공급망 지침에 포함될 가능성이 커 제품을 만들고도 수출을 못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EU는 공급망 실사를 위한 핵심 원자재로 30개 물질을 지정하고 있는데 이 중 마그네슘, 희토류를 포함해 19개 물질의 주요 공급국가가 중국이라는 점이 논란거리다. 한국 내에서도 전기차 배터리 생산 시 중국산 원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어 대EU 수출에 빨간불이 들어올 수 있다.

핵심 원자재가 원산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미국은 일반 승용차와 트럭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철강과 알루미늄을 70% 이상 역내산(미국 등 북미산)을 사용하라고 강제하고 있다. 또한 핵심 기술을 특정 국가가 독점하는 상황에서 원산지가 수출 금지의 지렛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미국은 지난해 8월에 3나노미터 이하의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당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생산한 제품을 미국산으로 간주하면서 중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반도체나 장비의 수출을 규제하면 합리성을 의심받기 때문에 안보를 이유로 전 세계 물량의 3분의 2를 미국이 공급하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빨간딱지를 붙여 대중국 무역을 틀어막을 심산이다.

소프트웨어를 원산지 기준으로 삼으면 일반 부품과 달리 제3국 조달을 통한 우회 수출도 어렵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 섬유류 원산지 규정이다. 임금이 저렴한 곳에서 생산한 후 원산지를 세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당국 내 원자재 비중을 40% 이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재단과 봉제 작업도 특별 요건으로 부과하고 있다.

사람에게 국적이 있다면 물건에 원산지가 있다. 국적에 따라 비자 기준이 다르듯 물건의 경우 국경을 유리한 조건(낮은 관세 등)으로 통과하기 위해 원산지를 밝혀야 한다. 잘못 표기하면 엄청난 페널티가 부과된다. 미국에 수출하면서 원산지를 속이면 고의 여부를 떠나 회사가 망할 정도로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한다.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도 제재 대상이 된다.

제품 개발부터 원산지 제도를 감안해 원산지 장벽을 뛰어넘을 비책을 강구해야 국제 비즈니스에서 강자로 우뚝 설 수 있다. 갈수록 제품 기술력 못지않게 국가 간 원산지 허들을 무력화할 기술이나 부품 개발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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