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3. 망우리 풍수산책 (2)

손건웅 2023. 5. 2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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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묘소.

승려인 만해의 묘소가 쌍분인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해는 1920년대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고,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만해를 만났을 때, 인사를 하며 자기를 못 알아보겠냐며 계속 묻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며 외면했다고 한다. 만해는 광복을 1년 앞 두고 입적했다.

만해에 대해 일방적 신격화를 저어하는 주장도 있다.

“만해는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하며 지도자적 능력을 갖추었지만, 파계를 한 것은 승려답지 않은 행동이며,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함 등등...”

위인에 대한 무조건적 신격화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란다.

만고 절창(?唱) <님의 침묵>을 남긴 것만으로도 만해의 삶은 여한이 없을 듯하다. 얼마 전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 초판본이 경매에서 1억 5천만원에 낙착되었다고 한다. 범부의 시선은 이런 곳에 머무니 어쩔수 없는 한계이다. 

만해 묘소 맥로도.

만해 묘역 뒤쪽에서 비스듬히 내려온 맥로가 만해 묘소에 14회절, 부인 유씨 묘소에 11회절의 명당을 맺었다.

만해는 명당과 인연이 많았던 분이라는 생각이다. 그가 1933년 이후 입적 때까지 살았던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도 양택으로는 더 바랄 것 없는 대명당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8~1959) 묘소.

죽산은 일제강점 시기에 사회주의자로 항일운동을 했다. 1932년 9월 상하이(上海 )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을 복역한다. 1945년 2월에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었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을 하고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 노선을 걷는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제 1대 농림장관과 제 2대 국회부의장(1950. 6 ~1954.5월, 연임)을 역임했다.

죽산은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여 80만 표를 얻고 낙선한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한다.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된 선거에서 조봉암은 득표율 24%에 126만 표를 얻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자유당은 위기감을 느끼며 정치공작을 시작했다.

1958년 1월말, 죽산은 진보당 간부들과 함께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1959년, 3심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해 7월에 사형을 집행한다.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붕괴됐다. “아버지 재판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죽산의 딸, 조호정 여사가 생전에 했던 탄식이다.

이 사건은 2011년 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13명의 법관이 전원 일치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다.

죽산 묘소 맥로도.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죽산 묘소에 14회절의 대명당을 맺었다.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에게 명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의 삶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부친의 복권을 위해 평생을 보냈던 죽산의 장녀 조호정 여사는 2022년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묘소.

오석(烏石)의 묘비는 조각가 차근호의 작품인데, 아이들이 부둥켜 앉고 있는 이중섭의 그림이 새겨져 있고 흰 꽃이 꽂혀있다.

이중섭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평양의 외가에서 자랐다. 외조부가 소문난 부자여서 유년 시절은 유복하게 보냈다.

1930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진학한다. 예일대학 미술과를 졸업한 임용련 선생을 만나 미술 세계에 입문한다. 그는 미술전에 “소”를 소묘한 작품을 출품했는데, 당시 일본인에게 “소”는 한국의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로 여기던 때였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 학교에 입학했지만 다음 해에 문화학원으로 전학하여 졸업한다.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1945년 귀국을 하고, 그해 5월에는 원산에서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이남덕(李南德, 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한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월남하여 각지를 전전하며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가난에 시달린다. 설상가상 1952년, 장인이 사망하자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난다.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그가 보낸 편지와 엽서에 남아있다.

험한 생활고와 영양실조 등 건강이 악화된 이중섭은 병원을 전전하다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묘소 옆의 소나무는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이 심었다고 한다.

공동묘지를 분양할 때 1~5등급의 구분이 있었는데, 등급에도 들지 못하는 등외지에 이중섭을 모셨다. 그러나 풍수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명당에 해당한다. 묘소는 왼쪽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13회절의 명당을 맺었다. 그의 유해의 절반은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냈다고 한다.

@ 부인 이남덕 여사는 2022년 8월에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 지난 4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켈렉션에서 이중섭의 엽서화, 편지화 등이  전시되었다.


강소천(姜小泉, 1915~1963) 묘소.

강소천의 묘소는 망우리 묘역 입구의 맞은 편 야산에 자리한다. 묘비에는 그의 대표작인 동시(童詩) “닭”이 쓰여있다. 본명은 강용율(姜龍律)이고, 소천은 호이다.

그는 대대로 기독교를 신앙하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영생고보 시절, 일제의 조선어 탄압에 좌절과 분노로 1년 간 북간도를 방랑한다. 여기서 그의 영원한 스승 백석을 만나고 대표작 “닭”을 창작한다. 이는 어린이 잡지 <소년>에 실렸으니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해방 이후,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신앙은 탄압받고 소천의 집안은 재산이 몰수 당했다. 6·25가 발발하고 1·4후퇴 때, 소천은 미군의 LST 함정을 타고 구사일생으로 월남한다. 1952년 소천은 <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을 맡으면서 신문과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고, 1953년 서울로 올라온 소천은 옛 친구 전택부를 만난다. 전택부에 이어 <새벗>의 주간을 맡으면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소천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열띤 어조로 한글 사랑을 외쳤다.

1963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48세였다. 소천이 남긴 동요와 동시는 300편에 달하니, “소천은 갔지만, 소천은 어린이와 더불어 동화나라에 살아 있으리라” 박목월의 추모글이 그의 영원한 삶을 말해주고 있다.

소천 묘소 청룡방에는 1988년에 별세한 부인 최해주 묘소가 있다.

5,60여 기에 달하는 묘역 중에서 소천의 묘소가 가장 좋은 15회절 명당에, 그리고 부인은 13회절 명당에 자리한다. 후손들이 잘될 수밖에 없는 명당이다.

1981년 소천의 전집이 출간되었고, 1985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87년에는 강소천 문학비가 제막되었으니 부인이 별세하기 1년 전이었다.

2002년에는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소천의 작품과 자료를 수록하니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부친의 유촉(遺囑)을 받든 아들의 정성이 감동적이다.

묘역에는 역사·문화적 유명인들 말고도 의외의 인물도 있다.

정창성(鄭昌成, 1905~1956) 부부 묘소.

이병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鄭雲燦,1947년생)의 부모 묘소이다.

원래 정운찬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는데, 9살 때 부친이 별세하고 힘든 유년을 보냈다. 11살 때에 가족과 함께 상경한다. 이후 경기중과 경기고, 서울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미국 마이애미 대학에서 석사와 프린스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재직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한국은행 총장에 물망에 올랐으나 본인이 고사했다. 그후 노무현 정부 시절에 서울대 총장(2002년 7월~2006년 7월)을 역임한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권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2009년 9월에 국무총리로 취임했으나 용산참사의 뒤처리와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 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KBO 총재(2018. 1월 ~ 2020. 12월)를 역임했다.

묘소는 1973년 별세한 모친과 합장으로 모셨다. 묘소는 산책길 하단에 자리하니 일반인들은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뒤에서 내려온 맥로가 산책로를 지나 정운찬 부모 묘소에 15회절의 명당을 맺는다. 묘소는 청색의 길흉경계선 안쪽에 절묘하게 자리한다. 정치인 선영이 15회절 명당이면 대권반렬에 거론될 수 있다. 유년시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명문학교를 졸업 한 이후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것은 부모님 묫바람이 크게 작동했다는 판단이다.

@ 오래 전, 정운찬 조부모 묘소를 간산한 적이 있다. 부친의 삶과 정운찬 유년은 조부모 묘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 본인에게 풍수적 영향을 가장 많이 주는 것은 부모님 묘소이다. 조부모 묘소가 명당이어도 부모님 묘소를 흉지에 모시면 본인의 삶은 힘들어진다. 조부모 묘소가 흉지여도 부모 묘소가 명당이면 정운찬처럼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단양(丹陽) 이씨(1963년 졸) 묘소.

망우리 김상용 묘소의 근처, 산책길 아래에 자리한다. 비석을 확인하니 아들(子)은 차경섭 손자(孫)는 차광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향이 평안북도인 차경섭의 부친은  북에서 돌아가신 듯하다.

차경섭은 1960년 서울 중구 초동에 차산부인과를 개업했다. 1984년, 서울 역삼동에 차병원을 이전·설립하고 서울대병원에 이어 두 번째로 “시험관 아기”에 성공하는 등 산부인과 병원으로서 이름을 날린다. 1995년, 분당차병원 개원과 분당차여성병원을 설립한다. 1997년, 포천 중문의대를 인수하여 차의과대학을 설립하고 17년간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했다. IMF사태로 어려웠던 때인 1998년에는 부자(父子)가 400억 원을 재단에 헌납했다. 2010년에는 줄기세포 기술과 한의학, 의학이 결합한 명품병원 “차움”도 개원했다. “차움”에는 해외 VIP 고객들이 대거 몰리며 의료 한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2016년 “박근혜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명성에 흠이 나기도 했다. 오늘날의 차병원(그룹)은 전 세계 7개 국, 86곳의 의료기관과 1,800여명의 의료진과 14,000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헬스케어 그룹으로 생식의학과 줄기세포에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고(故) 차경섭은 200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7년에는 제4회 서재필 의학상, 2009년에는 자랑스러운 연세인(延世人)상을 수상했다.

묘소 우측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20회절의 대명당을 맺은 곳에 단양이씨를 모셨다. 필자가 확인한 망우리 묘소 중에서 가장 좋은 명당이다. 차병원의 위상에는 이곳의 풍수파워도 반영되었다는 생각이다.

전통풍수에서는 혈(穴) 아래가 널찍하면 전(氈)이라 하고 비교적 좁으면 순(脣)이라 하여 혈의 기운이 충만함을 의미한다. 전순(氈脣)의 유무로 진혈(眞穴)의 여부를 판단하기도 하니, 전순이 없으면 자손이 없거나 후손이 재앙을 당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단양이씨의 묘소는 전순이 촉박(促迫)하여 인위적으로 축대를 쌓았다. 전통풍수의 관점이 맞지 않는 대목이다. 필자는 당처(當處, 묘소)의 회절수로 명당의 진가 대소를 판단하는데, 이것이 합리적이고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건강을 위하여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근현대사의 위인들의 묘소까지 살펴보면 가슴 뿌듯하며 마음 아픈 사연도 전해지리라. 풍객에게는 뜻밖의 명당을 발견하는 망외(望外)의 기쁨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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