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음향기술자가 종이 위에 믹싱한 텅 빈 상상계

임인택 2023. 5. 2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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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8회 한겨레문학상 당선자 김희재
‘사운드 엔지니어’로서 홀로 습작한 장편 <탱크>로 제2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김희재(36)씨.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올 1~3월에 일이 없어 정말 막막했어요. 프리랜서는 1주일만 일이 없어도 불안해지는 병에 걸려요. 왔다 가는 시기라는 걸 알아도, 안 그래도 제가 걱정이 많으니까, 클라이언트가 이제 나를 버렸구나, 그럴 성격도 못 돼 해본 적 없는 영업을 이제 해야 하나 생각해요. 그런데 소설을 쓰는 동안 그걸 잊었어요. 굉장히 좋은데? 계속 써야겠다 그런 느낌요.”

올해 28회를 맞은 한겨레문학상 공모전(장편)에서 드물게 ‘만장일치’로 최종심 30분 만에 새 당선자로 결정된 김희재(36)씨의 직업은 ‘사운드 엔지니어’다. 지난 13년 동안 해온 일이다. 그가 작업 특성상 긴 대기 시간 또는 일이 끊긴 사이 쓰기를 병행하여 소설 공모전 도전 네번 만에 한겨레문학상 당선작 <탱크>를 내놓았다.

작곡가가 지은 곡이 영화, 드라마, 공연 등에 깔리려면 곡을 녹음하고 믹싱하는 사운드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연주자를 섭외하기도 한다. 녹음 뒤엔 극과 음악을 해석하며 증폭시켜야 할 구성음 등을 조정한다. 김희재씨는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출·기획, 시나리오, 제작 기술, 이론 등 영화 창작자를 양성하는 영화영상학과(동국대)에 2006년 진학해 2학년 때 선택한 전공이 사운드 기술이다. 해당 전공자는 입학 동기생 중 3~4명뿐이었다.

―음악감독과 비슷한가요, 이유가 뭐죠?

“그냥 기술자예요. 원래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입학했는데 실력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기술을 익혀야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음악도 좋아했고요.”

지난 18일 진행된 인터뷰 일정을 잡고자 전날 나눈 첫 통화 2분 만에 터놓은 저 말은 기술자 김희재가 앞으로 작가 김희재로 호명될 때마다 두고두고 상기될 법하다. 알고 보니 “겁 많은… 뒤돌아보기 좋아하는… 현실주의자”의, 낙관과 비관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상상계를 그의 두번째 완성작인 <탱크>에서 본 바대로라면 그렇다.

본래 밀폐 저장형 구조물을 의미하는 ‘탱크’는 소설에서 산속에 자리잡은 컨테이너의 별칭이 된다. 간절히 염원하고 기도하면 성취되는 신묘한 공간이다. 믿음과 희망을 광적으로 부여잡고 있는 현대인들의 절망적 세계가 재현된 방식. 심사위원 김금희 작가의 말마따나 “텅 빈 믿음을 필요로 하는” 세태다.

이는 윤리적으로 울뚝 재단되지 않는다. 김씨는 “하물며 로또가 되려면 로또를 사는 정성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나”라는 제 양식을 유보한 채 “성공 비법으로서의 상상훈련과 같이 네가 바라는 것이 곧 네 세계가 될 거란 믿음의 사람들, 본래 낙관적이어서가 아니라 낙관적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들의 어떤 절실함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10월 쓰기 시작한 <탱크>를 이끈 시사적 잔상이 때마침 두가지였다. “신문 기사 보길 좋아한” 까닭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으로 전해진 ‘탱크’의 강력한 이미지, 국내외 도처에서 타전되는 공포의 화재. ‘탱크’라는 제목부터 확정하고 이미지, 주제, 인물 등을 “채색하는 느낌으로” 구체화했다. 심사위원들이 가장 의아해한 작품 제목의 경위이고, 작위성을 무릅쓰고 이야기 속 ‘불’이 불가항력적으로 지속되는 까닭이겠다.

당선 소식은 지난 16일 저녁 7시가 조금 넘어 출판사를 통해 전해졌다.

―듣고 어떠셨어요?

“‘한겨레입니다’만 듣고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당선’이란 말도 안 했는데. 출판사 분께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구독 전화일 수도 있잖아요?) 아하하, 그건 아니었어요, 다정하게 소식을 알려주셔서. 너무 힘들었는데 더 안 고쳐도 돼서 너무 기뻤고 일찍 등단한 분들은 웃으시겠지만 이게 제 인생에서 너무 빠르다 생각이 들어 너무 무서웠어요. 걱정이 많아 그런가. 지금도 초현실 같아요.”

소싯적(1987년 대구 출생)부터, 특히 화가인 어머니 덕분에 문학과 음악, 그림에 널리 노출되었던 당선자는 2021년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처음 소설을 응모했다. 시나리오의 트리트먼트 단계(시나리오 쓰기 전 얼개로 대사 없음)에서 이야기가 늘 길어지는 탓에 소설로 방향을 틀었는데 본심을 통과했다. “신기했다.” 이를 장편으로 늘려 출판사 소설공모전에 지난해 출품했으나 예심에서 낙선, “그렇지, 당연히 될 리가 없지” 하고 작품을 폐기했다.

두번째 장편이 <탱크>로, 쓴 지 두달 된 초고를 지난해 12월 일간지 장편공모전에 응모해 본심을 통과했고, 7할가량을 수정해 도전한 한겨레문학상에서 “기성 작가(가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심사위원들의 인상평을 듣게 된다.

―한번 최종심 오른 응모작은 수정하기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거의 바뀌지 않은 채 다른 공모전들에 또 제출되고 또 최종심만 가고.

“그런 생각을 안 해봤어요. 이제껏 쓴 소설을 누구한테 보여준 적이 없어요. 일단 길고, 완성도나 재미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얼마나 괴롭겠어요. 아이디어를 평가받고 싶어 <탱크> 초고를 응모한 건데 이미 계속 고치고 있었어요. 눈에 밟히는 게 되게 많았어요. 그냥 부족했어요.”

<탱크>로 제2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김희재(36)씨가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작품 구상 배경 등을 설명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마포 신수동 한겨레출판 회의실에서 최종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왼쪽 앞부터 시계방향으로 선우은실(심사평 대표필자)·서영인 평론가, 이기호 작가, 김건형 평론가, 김금희·편혜영·강화길 작가.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씨가 창작을 배운 건 대학 1학년 때 시나리오 기초가 전부다. 불행히(?) 지난 상반기 음향 작업 의뢰가 없어 소설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영향과 소설을 “편식했던” 성장기가 밑천이 된 모양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페르난두 페소아 등 좋아하는 작가군에 최근 앨리 스미스를 읽고 추가했다. 국내 작가도 많다. “현실적으로 살 길”로 음향 기술 업무를 시작한 13년 전 한해를 삶에서 가장 고된 시기로 기억하면서도, 김씨는 “이렇게 오래 한 걸 보면 적성에도 맞았던 것 같고, 함께 일하는 작곡가, 아티스트들을 통해 올바른 예술 소비에 대해 많이 배우고 습득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들은 익히 알려진 영화, 드라마 등에 걸쳐 있다. 다만 음향 영역에서도 여러 엔지니어 가운데 겨우 한몫이라며 작품이 언급되길 겸연해했다.

“한달 동안 할 말을 오늘 하루 다 한 것 같다”는 김씨에게 작가의 각오나 포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당선 소식이 왜 두려웠는지 마음의 실체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가 답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잘하고 싶어서 무서웠어요.”

겁 많다는 현실주의자가 작정한 소설을 전망해보자.

―‘탱크’ 제목은 바꿔 출간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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