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여성의 권리
상식적 판결 최근에야 확정
남녀평등 헌법정신에 안 맞는
가부장 전통·법률 바로잡아야
딸 둘을 둔 남성이 뒤늦게 혼외자인 아들을 얻었는데 수년 뒤 사망하였다. 그 아들의 생모가 남성의 유해를 배우자나 딸들과 상의하지 않고 추모공원에 안치하였다. 배우자와 딸들은 남편이자 아버지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여성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사 주재자는 장남이 되는 것이 조리에 맞는다는 2008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혼외자인 아들에게 유해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지난 5월 11일 판례를 변경하여 장녀도 제사 주재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은 과거 판례가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제11조 제1항 및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성립과 유지를 보장하는 헌법 제36조 제1항의 정신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헌법 규정은 1987년 개헌 당시 규정된 것이지만, 같은 취지의 헌법 규정은 1948년 제헌 당시부터 있었다. 제헌 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 성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20조는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남녀평등과 이에 기초한 혼인의 보호는 헌법 제정 당시부터 계속 유지되어 온 헌법의 기본 규정이다. 그런데도 조리를 앞세워 제사 주재자는 남성이 되어야 한다고 한 15년 전의 판례는 이해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조상 추모 및 부모 부양에서 아들과 딸의 역할 차이가 없고 남성 상속인 우선이 보존할 전통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헌법에 맞는 판단이다.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의 뿌리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한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이나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이라고 선언하였다. 임시헌법 제9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법률에 의하여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갖는다고 규정하여 참정권 행사에 남녀 구별을 두지 않았다. 1919년 당시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있던 나라는 뉴질랜드와 호주 정도밖에 없었다. 미국이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6년에야 남녀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헌법이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보다 앞서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쉽게도 이처럼 앞서 있던 헌법정신이 헌법 제정 이후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가부장적 전통이 뿌리 깊은 탓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이 만든 남성 중심의 법률이 그대로 유지된 탓도 컸다. 다행히 1988년에 헌법재판소가 탄생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헌법률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헌법재판소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법률에 대해 위헌 선언을 하자, 같은 규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일본도 서둘러 관련 법률을 개정하였다. 헌법재판소가 탄생한 지 벌써 35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위헌법률이 제거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헌법에 맞지 않는 법 해석과 관행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작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19%, 지역구 의원은 11.5%에 불과하다. 경제활동 참가율도 2021년을 기준으로 남성은 72.6%, 여성은 53.3%인데, 육아를 목적으로 한 비경제활동인구의 98%가 여성이다. 이런 현실은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다. 과감한 제도 개선을 통해 여성의 정치, 경제, 사회 활동 참여를 확대하여야 한다. 여성의 권리를 확대해야 인구 감소와 경제성장 둔화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강일원 변호사·전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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