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우리가 사냥하고 또 보호하는 건 '스토리'

정혜경 기자 2023. 5. 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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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의 스토리 사냥법 - '안전가옥'이 일하는 법


다소 K-콘텐츠 진흥 및 홍보 관계자 같은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도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메가 히트작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기대에 비해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 그것도 긴 글을 집중해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가 '출판업계'에 강한 비관적 전망을 드리우는 시대입니다.

'뇌피셜'이 아니라 통계로도 나타나고 있죠. 문화체육관광부가 펴낸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종이책, 전자책, 웹소설, 오디오북을 포함한 서울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2013년 81.4%에서 2021년 54.7%로 대폭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영원하다'는 지조로 한국의 J. K. 롤링을 찾을 것이라 호언하며 출판 산업의 미래에 베팅하는 '스웩(Swag)'을 보여주는 회사가 있다면 어떨까요?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 안전가옥... 직원들은 'PD'


어떤 이야기라도 안전하게 보호하는 안식처가 되겠다는 포부를 담은 출판사, 아니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이 주인공입니다. 2019년 본격적으로 '출판업'으로 사업 방향을 틀어 올 3월 말 기준 출간 도서가 60권에 이르렀습니다. 세로로 길쭉한 형태로 한 손에 잡히는 판형으로 제작돼 눈길을 끌었던 '쇼트 시리즈'에선 15쇄를 찍은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2020)』 같은 베스트셀러도 배출했습니다. 안전가옥이 만드는 이야기들 중엔 추리, 판타지, 호러, 스릴러, 각종 형이상학적 소재와 배경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모인 이야기들을 단순 출판에서 끝내는 게 아닙니다. 일단 출간 가능한 소설 형태의 스토리 IP(저작권)가 확보되면 영상, 영화, 웹툰 등의 제작 유통사와 2차 판권의 사업화를 추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SF8에 「우주인 조안」과 「증강 콩깍지」가 단편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뒤틀린 집」의 경우 단행본 출간 전 줄거리만 있는 단계에서 영화화가 결정돼 지난 2021년 영화로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기존 '출판사'의 이미지를 깨고 원천 확보된 이야기들로 다른 매체로의 제작 프로덕션 역할까지 맡는 그야말로 '기획사'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통상 출판사 에디터의 일이라 하면 작가, 그것도 소설가의 초고를 바탕으로 방향을 가다듬거나 수정하고, 오탈자 교열 정도의 역할에 그친다고 생각하지만 안전가옥은 좀 다릅니다. 일단 구성원들의 직함부터 조금 특이합니다.

대표를 포함해 모두 16명이서 일을 하는데, 대다수 직함이 'PD'입니다. 소설의 단초와 메시지를 제공하는 건 작가이지만 그 과정을 이 PD들이 함께 풀어나갑니다. 트리트먼트 작업을 돕는 '크리에이티브' 영역엔 개발팀 소속 이른바 '스토리 PD' 8명이 있습니다. MBC에서 지난 2009년 방영된 드라마 「탐나는도다」 극본을 쓴 이지향 PD가 스토리팀 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토리가 어떤 매체와 작업할 수 있고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는 이른바 유통과 사업 PD들이 고민하고 협력사를 구하러 다닙니다.

"단편을 쓸 때에는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장편을 쓸 때에는 트리트먼트(본편을 쓰기 전에 구체화한 줄거리)를 함께 만들어갑니다. 에이포로 한 3-40장 정도 되는 이야기의 디테일한 설계도를 만드는 건데, 실제로 문장만 쓰면 책이 나올 수 있는 수준까지 사건을 기술합니다."

안전가옥 김홍익 대표의 말입니다.

김 대표는 '공동작업'이 되는 만큼 작가의 자율성이 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작가의 메시지, 그러니까 정수(essence)를 작가에게만 뽑아내라고 맡기는 건 일종의 방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작가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는 거죠. 작가는 자기가 진짜 생각해야 하는 것들만 생각하게 돕고, 나머지 것들은 피디와의 또는 다른 작업자들이 도울 수 있는 거죠. 오히려 이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이나 창의성을 해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 살려줄 여지가 크다고 생각해요. 피디가 절대 할 수 없는 고유한 일을 작가님들은 하는 거고, 저희는 그 영역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가장 비즈니스 친화적인 제조업.. 스토리는 영원하다

'CJ ENM'이나 '스튜디오드래곤'같은 대형기획제작사와 비슷한 구조와 역할을 '출판사'가 갖춘다는 아이디어는 창업자인 김홍익 대표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삼성전자 기획자에서 2012년 카카오로 둥지를 옮긴 김 대표는 당시 카카오 성장기에 김범수 의장과 인수합병 업무를 하던 전략팀 출신입니다.

우연히 대학 동창이자 같은 '글쓰기 동아리'에서 수학한 친구인 HGI 정경선 의장으로부터 창작자를 전문 육성하는 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와 투자를 받았던 것이 안전가옥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대기업을 거치면서 느낀 건 '올드스쿨 플레이어들'이 잘할 수 있는 판은 이제 끝나가는 것 같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바뀌지 않을까를 고민했을 때 떠오른 건 '스토리텔링'과 '이야기'의 원천이었어요. 이 코어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이 코어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무엇이 가장 핵심일지를 떠올려보니 돈과 창작자더라고요. 창작자를 육성해 보자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2017년 성수동 공장단지에 넓은 공간을 마련해 두고 시작한 오프라인 살롱이 '안전가옥'이었습니다. 당시 창작자들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으로 주목받으며 지금은 폐업한 '취향관', 현재도 활발하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트레바리'와 함께 자주 거론되곤 했었는데요. 2년 만에 오프라인 살롱을 접고 '출판업' 등록을 하면서 사업을 피봇하게 된 건 커뮤니티의 뾰족한 구심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동시대 예술인들이 모여 함께 어울리던 살롱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 구심점이 있어야 충분히 강력한 커뮤니티가 생성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먼저 콘텐츠를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자라는 거였고. 지금은 한국에 J. K. 롤링 같은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스토리' 중심 기획 제작사의 전진 기지로 '출판업'을 선택한 데엔 어떤 이유가 있을까. 김 대표는 '비즈니스적 관점이 주효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책이 사업적으로 다루기 용이한 매체라고 생각해요. 영상은 아이템이 표류하고 있을 때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바이어가 결정을 하는 거지 셀러가 '가격을 깎을게'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책은 언제 내보낼지, 얼마에 책정할지 그리고 몇 부나 만들어서 어디에 유통할지를 정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일종의 제조업입니다. 그래서 소설이야말로 사업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저희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특히 지금처럼 유례없는 한국 콘텐츠 활황기에 해외 사업자들과 판권을 계약할 때도 '소설' 형태의 IP는 오히려 영상물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상 판권을 거래하는 글로벌 마켓이 있는데 웹툰이나 웹소설은 거래되기가 어려워요. 해외에선 워낙 생소한 개념이거든요. 유럽이나 미국이나 영상 마켓의 경우에도 이미 한국에서 영상으로 제작된 경우가 아니면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가 아니면 그 시장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책의 출판권을 가진 상태에서는 훨씬 더 용이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글로벌에서 '텍스트'는 유의미한 단위라 확장 가능성도 더 크다고 봐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정혜경 기자choi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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