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야생화 만나는 ‘천상의 화원’ 인제 곰배령 트레킹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3. 5. 20. 14:08
‘야생화 보고’ 인제 곰배령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장쾌한 계곡 물소리·새소리 즐기며 완만한 코스 트레킹/설악산생태탐방원 백담사 템플스테이 명상·별빛나들이 등 다양한 힐링프로그램 운영
졸방제비꽃, 큰앵초, 참꽃마리, 나도개감채. 어찌 이리 예쁠까. 무심코 지나치던 아주 작은 꽃마다 다양한 사연 담긴 예쁜 이름 지녔구나. 몰라봐서 미안해. 이제 너의 이름 꼭 기억하고 자주 불러 줄 테니 내게로 와서 가슴에도 예쁜 꽃 한 송이 피워주렴. 완만한 오솔길 따라 수줍은 얼굴 내미는 보라꽃, 하얀꽃, 노란꽃과 인사하느라 정상으로 가는 발길이 자주 멈춘다. 그렇게 쉬엄쉬엄 걸어 계곡 물소리가 끝날 때쯤 울창한 숲이 사라지고 갑자기 하늘이 활짝 열리면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다.
◆‘야생화 보고’ 곰배령을 아십니까
강원 인제군 점봉산 산림생태관리센터에 도착하자 평일 오전인데도 주차장에 빈자리가 거의 없다. 곰배령 트레킹은 예쁜 야생화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요즘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고 오전에만 입산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신분증으로 예약 정보를 확인한 뒤 번호가 적힌 입산허가증을 받자 곰배령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인제국유림관리소 점봉산산림생태관리센터 홈페이지(www.foresttrip.go.kr)나 전화로 반드시 사전에 예약해야 하고 신분증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탐방일 4주 전 수요일 오전 9시에 예약이 시작되고 성인 2명까지만 가능하다. 단 만 18세 이하 미성년자는 사전 예약이 필요 없고 성인 1인당 5명까지 동행할 수 있다. 하절기(4.21∼10.31)는 오전 9·10·11시, 동절기(12.16∼2.28)는 오전 10·11시에 입산하고 곰배령 정상에서는 오후 2시 이전에 무조건 하산해야 한다. 하루 탐방 인원도 최대 450명으로 제한된다.
이처럼 까다롭게 통제하는 이유가 있다. 곰배령을 포함한 점봉산 일대가 1987년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점봉산 남쪽 단목령, 북암령, 조침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서쪽 작은점봉, 곰배령, 가칠봉을 포함한 2369㏊가 천연활엽수 원시림 보호구역이다. 한반도 자생식물의 약 20%인 854종, 조류·포유류 71종이 서식해 국내 최고의 보전 가치를 지닌 산림으로 평가된다. 이에 1993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됐다.
◆수줍은 야생화 가슴에 물들다
곰배령 트레킹은 점봉산 산림생태관리센터에서 출발해 강선마을, 곰배령을 지나 다시 점봉산 산림생태관리센터로 돌아오는 순환형 트레킹 코스다. 1코스는 편도 5.1㎞로 1시간50분 걸리고 2코스는 편도 5.4㎞로 2시간이 소요된다. 2코스는 곰배령 정상에서 하산만 가능하고 난이도가 꽤 있어 1코스 왕복을 추천한다.
계곡을 따라 놓인 완만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하얀꽃을 활짝 피운 야광나무가 인사하고 당단풍나무는 초록 잎을 맘껏 펼쳤다. 기암괴석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는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장쾌하다. 울창한 숲이 그늘을 만들어 주니 햇볕에 얼굴 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이름 모를 새소리 청아하게 울려 퍼지고 두 마리 나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안내하니 마음은 편안하고 발걸음은 사뿐하다.
야생화가 그렇듯 화려하지는 않다. 풀숲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드문드문 아주 작은 꽃잎들이 수줍게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을 정도. 하지만 색도 모양도 다양해 지루할 틈이 없다. 연노랑 산괴불주머니가 반갑게 인사하더니 보랏빛 큰구슬붕이가 어서 오라 손짓하고 새하얀 나도개감채가 나도 좀 봐 달라며 아우성이다. 참꽃마리는 동그랗게 말려 있다가 기지개를 켜듯 깨어나며 순백의 다섯 장 꽃잎을 펼쳐 노란 수술을 드러냈고 바로 옆에선 졸방제비꽃이 연보라빛으로 유혹한다. 하얀 미나리냉이꽃은 제법 규모가 커 오솔길을 화사하게 꾸민다. 10여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강선마을의 집 마당엔 노란 미나리아재비가 풍성한 꽃밭을 이뤘다.
야생화 이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너무 지체하면 곤란하다. 강선마을 지나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중간 초소까지 낮 12시 전에 통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는 산행이 불가능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당한다. 길은 계곡을 몇 차례 넘나들며 정상에 가까울수록 조금씩 가팔라진다. 길옆에 가장 많이 보이는 원뿔형 풀은 양치식물 관중. 고사리를 닮아 간혹 채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먹으면 큰일 난다. 독성을 지녔으니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쥐오줌풀은 뿌리에서 내뿜는 냄새가 쥐오줌 노린내 같지만 여리여리한 연보랏빛 꽃은 수줍은 소녀의 미소를 닮았다.
곰배령은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교차되는 곳으로 남·북방계 식물을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 큰연영초, 피나물, 현호색, 얼레지를 뒤로하고 계곡의 물소리가 끊어지면 하늘이 열리고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해발 1164m 곰배령 정상이다. 신기하게도 산 정상에 약 5만평 규모의 넓은 초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하고 벌러덩 누워 있는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곰배령 표지석 앞에서는 인증샷을 찍으려는 여행자들로 줄이 길다. 표지석 맞은편 언덕 전망대에 오르니 곰배령 뒤로 작은점봉산(1294m)과 점봉산(1424m)이 펼쳐지고 설악산 중정봉(1664m), 대청봉(1708m)이 늠름하게 버티고 선 풍경이 장엄하다. 오전 11시에 산행을 시작했는데 김밥 한 줄 먹고 나니 오후 2시라 쉴 틈도 없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산을 내려간다.
곰배령 정상에서 반대 방향인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분소(귀둔리)로 이어지는 곰배골 탐방로도 있다. 하지만 점봉산 산림생태관리센터에서 입산한 탐방객은 이쪽으로 하산할 수 없다. 곰배골 탐방로는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을 통해 따로 예약해야 하고 역시 같은 길만 왕복할 수 있다. 2코스 하산길에서는 주목 군락지와 철쭉 군락지를 만날 수 있어 아직 기운이 충분하다면 걸어볼 만하다. 1코스는 마을 할머니들이 콩자루 이고 장 보러 다니던 길이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큰 무리 없이 걷을 수 있다. 운동화를 신고도 오를 수 있지만 정상에 가까워지면 살짝 가파른 길도 등장하고 왕복 10.2㎞로 총 4시간이 넘게 걸리기에 발목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등산화나 트레킹화가 좋다.
◆마음이 어렵다면 백담사로 가라
“현태야 사랑해!” 나름 목소리 크게 외쳐 봤지만 스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더 크게 외치란다. 볼륨을 최대한 끌어올려 백담사 수렴동 계곡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로 세 차례 외치고서야 스님은 ‘합격’ 판정을 내린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크게 부르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고 자신감도 얻는단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렵다면 내설악의 비경을 담은 백담사에서 자연과 마주하며 심리 치유를 얻는 템플스테이 명상이 큰 도움이 된다. 2018년 문을 연 국립공원 설악산생태탐방원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 화재 현장에서 트라우마를 자주 겪는 소방관들을 대상으로 시작했는데 호응을 얻으면서 고용노동부, 공무원연금공단, 교사 등이 단체로 참여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
설악산생태탐방원은 생태관광·교육 전문기관·힐링·치유·일일 생태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청소년 자연캠프 등 환경교육과 자연환경해설사·교원직무연수 등 전문 인력 양성 교육도 진행한다. 탐방원에 들어서자 놀라운 경치에 입이 딱 벌어진다. 숙소로 사용하는 생활관 너머로 설악산 자락인 치마바위, 갱기폭포, 안산이 펼쳐진 풍경이 장관이다. 생활관은 4인실 18개, 8인실 3개이며 100석 규모의 강당과 강의실 3개로 마련돼 단체 행사를 진행하기 좋은 곳이다. 생태관광은 마음열기, 심신안정, 자아성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그중 1박2일 설악산 생태탐방은 곰배령(봄), 십이선녀탕(여름), 주전골(가을), 백담사(겨울)에서 진행한다. 설악산국립공원 탐방로와 생태탐방원 인근에서 피톤치드를 즐기는 노르딕 워킹, 아이들 협동심을 기르는 숲 밧줄놀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설악산 곳곳의 미션을 해결하며 자연을 관찰하는 에코티어링, 천연기념물 산양 체험도 인기. 별빛소원등을 만들고 해먹에 누워 밤하늘 별들을 만나는 별빛나들이도 즐길 수 있다.
인제=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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