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계급이 뒤집혀도 갑은 착취하고, 을은 기생한다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 주의 : '슬픔의 삼각형'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남자(해리스 딕킨슨)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싼 데이트 밥값을 자신이 내자, 욱하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기보다 훨씬 잘 나가는 모델인 데다가 SNS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돈까지 많이 버는 여자친구(찰비 딘 크릭)는 어쩐 일인지 자기를 뜯어먹을 생각만 하는 것 같다. 뭔가 '평등'하지가 않다. 기분이 더럽다. 그토록 불평등한 관계를 쫑내고 시원하게 돌아설 일만 남았다. 그런데… 왠지 내가 더 아쉬운 것 같은 이 느낌 뭐지? 예쁜 데다가 돈마저 잘 버는 여자친구와 헤어지려니 도리어 자신이 손해 보는 것만 같다.

이걸 이성 사이의 오묘한 감정 문제로만 한정해서 본다면,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메시지를 짧은 식견으로만 해석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17일 국내 개봉하는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은 연인의 사례를 들어 모든 관계에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속성을 보여줄 뿐이다. 이 속성이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가는 중요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제 짓궂은 방식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의 짐작을 표출해 낼 것이다. 설령 갑과 을이 정반대로 뒤바뀌는 천지개벽의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갑은 착취하고 을은 기생한다'는 명제는 결코 변치 않을 거라는 신랄한 상상이다.

상상은 초호화 크루즈선 위에서 시작된다. 남자는 여자가 따낸 협찬 덕에 크루즈 여행에 동행한다. 배에는 이미 수많은 부자들이 탑승해 있다. 수류탄을 팔아 큰 부를 축적한 영국인, 비료사업으로 떼돈을 번 러시아인 등 국적은 달라도 모두 '돈'으로 사회적 권좌에 오른 이들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선박 승무원들의 갑이 된다. 여자친구에게는 을이던 남자도 '감히 웃통을 벗고 내 여자의 시선을 강탈해 간 선상 남승무원'에게 주의를 줄 수 있는 지위를 누린다. 또다른 갑들의 행태 역시 여간 다채로운 게 아니다. 근무 중인 여승무원에게 '역할을 바꿔보자'며 자기 대신 자쿠지에 들어가라고 강권하고, 모터로 움직이는 크루즈선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돛이 너무 더럽다며 승무원에게 억지를 부려댄다.
아주 재밌는 건, 감독이 이들에게 시달리는 을들의 처지도 그다지 온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늘 이렇게 응대하세요, 예썰! 예스맴! 원하시는 게 불법 약물이든, 유니콘이든! (…) 그리고 기억하세요. 일이 잘 끝나면 마지막 날에는 뭐가 들어온다? 화끈한 팁!” 선박 승무원 관리자가 회의 중 야심찬 목소리를 높이는 시퀀스는 차마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들춘다. 말단 직원들이 무릎까지 두드려가며 호응하는 구호는 다름 아닌 “돈! 돈! 돈!”. 두둑한 팁 생각에 단체로 환호하는 장면은 감독이 을이 선한 피해자보다 갑의 돈을 뜯어낼 기회에 신이 난 '기생인간'에 가깝다는 비판처럼 읽힌다.
이 블랙코미디의 압권은, 예상치 못한 난파 사고 이후 벌어진다. 무인도에 떨어진 갑과 을들 앞에 전에는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던 '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납작 엎드려 갑판을 닦고 화장실 청소를 도맡던 아시아계 중년 이민자(돌리 드 레옹)다. 살아남은 자 중에 바다 수영으로 먹거리를 채취하고, 불을 피워 조리할 줄 아는 건 오직 그 뿐! 생존만이 최대 화두인 상황에서 갑을병의 위계는 완전히 전복된다. '갑은 착취하고, 을은 기생한다'는 이치를 누구보다 뼛속 깊이 겪어온 병은 부를 과시하던 나이 든 백인 남자들의 발언권을 박탈하고, 가장 젊은 남자의 성을 착취한다. 불과 며칠 전까지 병이었던 그는 자신을 부려 먹던 갑들이 쓰기 좋아했을 법한 말을 고스란히 따라한다. “내가 다 먹여 살리는데, 이정도 혜택도 못 누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밥값을 내지 않던 여자친구와 차마 헤어지기는 싫었던 그 남자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가 바로 신흥 권력이 된 아시아계 중년 이민자에게 몸을 파는 대가로 먹을 걸 얻어내는 젊은 남자다. 심지어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공식적인 애인으로 선포해달라고 졸라댄다. '슬픔의 삼각형'이 진정 신랄한 게,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은 자기가 선 자리에 따라 순식간에 병도 갑이 되고 갑도 을이 되는 건 물론이며, 때로는 비위가 상할 정도로 자기 역할에 충실해 그 위계를 지독하게 강화한다는 점이다. 극 말미, 무인도에 떨어진 이들은 마치 난파사고의 충격과도 같았던 새로운 사건으로 반전을 맞는다. 그 뒤에 또다시 벌어질 권력의 전복과 그에 복무하는 갑을병 인간들의 너절한 삼각 역할극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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