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나의 작은 마을과 마음의 평화

2023. 5. 19. 23:0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타인의 적대감
내가 편히 쉴 곳은 어디 있을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최고로 멋진 아침’(‘레이디스’에 수록, 김선형 옮김, 북하우스)

애런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생계를 책임지느라 학교를 그만둔 후로 “미친놈처럼 일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버릇처럼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서른네 살에 외로움과 우울증이 찾아왔다. 뉴욕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했던 4년 동안 항상 긴장 상태였고 점심을 제대로 먹을 수도, 휴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밤에 마지막으로 택시 문을 닫으면서 애런은 “목적지가 있어야 해!”라고 중얼거렸다. 온종일 손님들을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던 그는 정작 허름한 셋방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나의 목적지는 어디라면 좋을까? 그는 궁리했다. 조바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곳. “작은 마을과 마음의 평화”, 그는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목적지일지도 모른다고 여겨 기차를 탔다. 지나치는 소도시들을 훑어보다가 좀 추레해 보이지만 우호적이고 친절한 인상을 주는 듯한 소도시, ‘플레전트’(Pleasant·기분 좋은)에서 내렸다.
조경란 소설가
그곳에서 방을 하나 얻었고 다음 날 아침에 애런은 커다란 창문으로 들이치는, “초록색 땅을 가로질러 펄떡거리고 휘청이며” 비치는 태양을 보았다. 그 빛은 나무들의 우듬지와 지붕의 처마, 날아가는 새, 창밖으로 내민 그의 손에도 환하게 비쳤고 닿았다. 그는 “탐욕과 원망이 없고 상업의 때가 묻지 않은” 창밖의 세상을 둘러보았다. “잃어버린 형제애의 낙원”을.

이제 애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불안의 시인’이라고 표현했으며 ‘서스펜스의 대가’라고 불렸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애런에게 곧 어떤 큰일이 벌어지게 해서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도 있을 테고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독자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질 듯한 서스펜스를 느끼게 해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서스펜스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긴장을 유지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아는 우리 시대 최고의 범죄소설, 심리소설 작가로 손꼽혀온 그이기에.

애런은 ‘마을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한다. 친구도 사귀었는데 맨발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열 살짜리 여자아이다. 아이는 산책을 좋아하는 애런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들을 보여주었다. 아내가 살해된 폐가, 강 상류에 버려진 칼 공장. 그러나 애런은 알지 못했다. 그 아이네를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들이라고 부르며 ‘남자하고 그렇게 어린애가 같이 다니는 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눈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에 불과하다. 타인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일자리를 구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 줄까 싶어 시도해 보지만 거절당하고 모두 애런에게 등을 돌린다.

어떤 면에서 내가 부족했던 걸까?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걸까? 그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우정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마을의 평화로움을 깨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당장 이 마을을 떠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발이 걸려 넘어진 애런의 눈앞에 커다란 방에서 보냈던 “영원한 가능성과 영원한 무의 아침들”이 스쳐 지나간다. 산책하다 농부가 준 희고 따뜻한 빵을 손에 들었을 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처음 만끽했던 순간도.

서스펜스에서 인물의 욕망에는 진실을 밝히려는 욕망, 남을 이기려는 욕망, 그리고 타인에게 속하려는 욕망이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휴식과 마음의 평화를 찾으러 이 마을에 온 애런은 타인에게 속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으나 실패했다. 그 실패에 그의 잘못은 없으며 해명해야 할 무엇도 없다. 그는 타인들의 적대감과 판단으로 이상한 사람,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 “하이스미스는 친밀한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함의 분위기를 혼미할 만큼 탁월하게 자아낸다”고 타임은 평했다. 어디선가 애런은 다시 ‘최고로 멋진 아침’을 맞게 될 수 있을까. 아침 햇살이 비쳐 들고 오해와 적대감과 배척이 없는 곳에서. 그런 어딘가가 휴식이 필요한 애런의, 독자들의 목적지가 될 수 있기를 아마도 작가는 바랐으리라.

조경란 소설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