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시의 정원’에 붉게 피어난 시들

2023. 5. 19.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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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 4인이 만든 ‘시의 정원’
자신들의 생각을 씨앗으로 삼아
역사를 통찰하고 관계를 맺어내
그곳은 ‘영혼의 소도’와 같았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시의 정원(Poetic Paradise)’은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기념 전시로서 문학과 미술의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리밍웨이, 임흥순, 안유리, 이매리 등 네 명의 미술작가는 자신이 감응한 문학 텍스트를 작업에 초대하며 시의 정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선, 전시의 전체 제목 ‘시의 정원’에서 ‘정원’이 ‘garden’이 아니라 ‘낙원’이라는 뜻의 ‘Paradise’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리베카 솔닛이 쓴 ‘오웰의 장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만일 전쟁과 정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때로는 정원이 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솔닛은 작가 조지 오웰이 정원을 가꾸었던 행적을 탐구하면서 그것이 문학적 비판 못지않은 미적 저항이었다고 말한다. 정원은 온갖 생명을 살리는 생태적 공간이자 식물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기약하는 희망의 공간이다. 또한 정원은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간신히 지켜내고 일구어 가야 할 정신적 영토이기도 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을 솔닛은 ‘정원’이라는 말로 압축한 것이다.
나희덕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시인
그렇다면 왜 ‘정원’에 ‘시’를 초대했을까? 여기서 ‘시’는 좁은 의미의 운문 장르만이 아니라 시와 산문을 포함하는 ‘문학’ 일반을 아우르는 말이다. 더 넓게 보면 ‘시’보다 ‘시적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흘러들어 올 수 있는 다양한 ‘아름다움’과 ‘자유’를 뜻한다. 존 캐리는 ‘시의 역사’에서 “시와 언어의 관계는 음악과 소음에 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 언어가 소음에 가깝다면, 시는 음악 곧 “기억에 남고 가치를 부여받도록 특별히 지은 언어”라는 뜻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이매리의 ‘너의 생각을 씨앗하라!’라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정원의 식물이 한 알의 ‘씨앗’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관객은 초입에서 생각의 씨앗 하나씩을 건네받는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두루마리 형태로 드리운 이 작품 제목은 단테의 ‘신곡’에서 온 문장이다. 긴 종이에 디지털 프린트된 이미지는 우리나라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된 사진이고, 그 이미지 위에는 금분으로 마틴 루서 킹의 연설문 중 일부를 필사했다. 시대마다 자유와 독립의 의미는 각기 달랐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씨앗 삼아 시대정신을 키워 가라는 선언이나 권유처럼 들린다.

안유리의 영상 작품 ‘스틱스 심포니’에서는 거대한 두 채널의 스크린 위로 흐르는 영상 이미지와 함께 고정희, 마이아 앤절로, 구리하라 사다코,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등의 시가 펼쳐진다. 국적이 다른 이 여성 시인들의 시는 광주 5·18민주화운동, 흑인 인권운동, 히로시마 원폭 투하, 나치와 스탈린 체제 속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스틱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흐르는 강을 말하는데,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심포니 형식으로 구성된 시 낭송을 통해 이질적인 공간들은 삶과 죽음을 넘어 서로 공명하며 강력한 파토스를 불러일으킨다.

대만 작가인 리밍웨이의 ‘투어리스트’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와 구례를 여행한 뒤에 그 기억이 깃든 사진과 물건을 전시한다. 또한 ‘편지 쓰기 프로젝트’는 관객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시하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누군가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그 기억을 나누는 행위로서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직접 경험하게 한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임흥순 작가의 ‘백년여관’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역사의 광장에서 시작된 전시가 점점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까지 파고들어가는 느낌이다. 임철우의 소설 ‘백년여관’에서 4·3항쟁, 5·18민주화운동, 보도연맹 사건 등의 희생자나 가족들이 가상의 섬 영도로 모여들었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는 네 명의 활동가를 초대하여 차를 나눈 영상이 펼쳐진다. 역사적 비극에 대한 슬픔과 죄의식을 치유하기 위해 마련된 그 공간이 ‘영혼의 소도(蘇塗)’처럼 느껴졌다. ‘시의 정원’을 돌아 나오며 ‘전쟁’의 반대말은 ‘정원’이라는 솔닛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피 흘리는 말들이 바로 ‘시’였다.

나희덕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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