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고분하던 푸틴이…어쩌다 전쟁광·민주주의 파괴자 됐을까 [Books]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5. 1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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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사람들 / 캐서린 벨턴 지음 / 박중서 옮김 / 열린책들 펴냄
푸틴의 사람들
러시아는 푸틴만의 나라가 아니다. 크렘린의 권력 회랑에는 푸틴의 사람들이 있다. 현직 로이터 특파원으로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캐서린 벨턴은 지난 20여년간 푸틴과 푸틴의 사람들이 민간회사와 국가 경제를 장악하고, 천문학적 축제를 벌이며, 범죄를 일삼는 통치 메커니즘을 치밀하게 추적한 책을 펴냈다. 2020년 파이낸셜타임스 올해의 책이다.

그에 따르면 푸틴과 소수의 KGB 사람들은 러시아를 약탈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에 출간됐지만, 러시아가 왜 자유세계와 전쟁을 벌이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2015년 런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푸틴의 은행가’로 불리며 1990년대 메즈프롬방크를 운영하던 푸가체프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은행이 파산한 책임을 물어 푸틴의 희생자가 된다.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 런던으로 도피하며 영국 대테러부대의 경호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는 푸틴의 사람들에게 몰락한 첫 번째 인물. 마피아 집단은 그를 니스의 요트로 끌고 가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으면 3억5000만달러를 내라고 요구했다. 법원은 재산을 동결했고, 자신의 조선소와 석탄 매장지를 푼돈에 정적들에게 빼앗긴다.

앞서 푸틴의 격렬한 비판자가 된 울리가르흐(러시아의 신흥재벌)로는 2013년 암살된 베레좁스키도 있었다. 전 재산을 빼앗고 베레좁스키를 옭아맨 방법은 영국 사법 시스템을 이용해 자산을 동결하는 방법이었다. 푸틴은 그만큼 적에게 공세를 가하는 데 능숙했다.

크렘린은 현금의 힘으로 런던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러시아의 옛 친구들은 모두 런던에 친척이나 내연녀를 두고 있었고, 주말마다 이 도시를 찾아와 현금 홍수를 일으켰다. 러시아 공직자들은 고급저택을 싹쓸이했고, 러시아 국영기업의 주식 공모로 런던의 홍보회사와 법률회사들은 큰돈을 벌었다. 전직 KGB 간부 겸 은행가 알렉산드르 레베데프는 런던 최대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를 매입해 파티의 단골이 됐다. 러시아 조폭과 연루된 가스무역업자 드미트리 피르타시는 케임브리지대에 거금을 기부했다. 보리스 존슨과 친구가 된 푸틴의 친구도 있었다.

푸가체프는 옐친의 사위인 유마세프와 함께 1999년 푸틴을 권좌에 앉힌 인물이었다. 그는 저자에게 푸틴은 가장 안전하고 충성스러운 하수인이었기에 후계자로 밀었다고 털어놓는다. “그 시절만 해도 푸틴은 주역 맡길 꺼렸고 자기를 권좌에 올려 준 사람들에게 유순하고 고분고분했다.” 4년의 첫 임기가 지나는 동안, 푸틴은 결코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인물로 변했다. 푸틴과 그의 사람들은 옐친 시대 시장의 자유를 억제하고 국가에 의한 장악을 시작했다.

이 책은 푸틴의 과거 KGB 관련자들의 러시아 경제 장악을 추적하기 위해 집필됐다. 하지만 푸틴의 금권 정치를 파고들면서, 정치와 사법까지 장악하고 축적한 부가 어떻게 서방의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부패시키는지 깨닫게 됐다. 숱한 내부자들을 인터뷰한 저자는 푸틴이 KGB 요원으로 활동한 드레스덴에서부터 흑색 작전에 능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재직 시절에는 이권 개입을 위해 범죄 조직과도 협력했음을 밝혀낸다.

게다가 푸틴의 복심은 크렘린 행정실의 고위직을 맡은 ‘실로비키’다. KGB와 군부 출신으로 푸틴의 손발이 된 이고리 세친 로스네프트 회장,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볼가 그룹 회장,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 등은 그의 손발이 되어 권력을 유지한다. 저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전 첼시 구단주 등 많은 울리가르흐들이 푸틴의 자산 관리인에 불과하다는 의심까지 한다.

푸틴이 권력을 잡던 초기, 체첸인들의 테러 행위로 의심받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는데 이는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푸틴 임기 내내 유혈 사태는 끊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두브롭카 음악당이 점령당했고,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극도 벌어졌다.

부를 거머쥔 과정도 흡사하다. 러시아 경제의 근간인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산업을 국영 기업이 장악했고, 민간 기업은 거리낌 없이 부자들에게 범죄 혐의를 씌워 몰수했다. 푸틴에 대항하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누구도 대항할 수 없었다.

푸틴이 다른 권력자와 가장 다른 건 냉전 시대의 세계관에 경도된 것이었다. 러시아 힘의 회복을 추구하며, 미국이 자국 힘의 약화를 추구한다고 간주했다. 그에게 국가 경제는 서방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냉전 시기의 KGB 지침서는 이 검은돈을 통해 완전히 재활성화됐다. 냉전 시대 KGB는 서방에 분열의 씨앗을 적극적으로 뿌렸다. KGB는 오래전부터 연계된 러시아 기업들로 부를 이전시켰고, 해외 첩보부 공작원들은 이 돈을 사용했다. 심지어 미국 대선에까지 개입해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데 일조한 것도 검은돈의 네트워크였다. 부패야 말로 러시아를 돌아가게 하는 혈액이었다.

푸틴은 정부의 지위를 사익 추구 수단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장착시켰다. KGB 인사들, 즉 충성하는 동맹자들의 네트워크는 경제와 권력을 모두 독점한 ‘KGB 자본주의’를 완성했다. ‘마피아 게임’은 흔히 선량한 시민의 죽음으로 귀결되곤 한다. 현실에서도 러시아의 끈질긴 도발은 서방 자유주의 질서를 흔들리게 하는 비극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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