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좀 다른 존재일지 모르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다[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바바야가의 밤
린오타니 아키라 지음·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 204쪽 | 1만3800원
키워드를 몇 가지 입력하기만 하면 그럴싸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인공지능 기술이 한동안 화제였다. 만약 소설 분야에서도 그게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인공지능에게 <핑거스미스>를 일본풍으로 다시 써달라고 주문한다면 <바바야가의 밤> 같은 원고가 나오지 않을까?
싸움을 좋아하는 여자(신도 요리코)가 야쿠자 조직에 납치당해 보스의 딸(나이키 쇼코)을 경호하게 된다. 보스의 딸은 대학에 다니는 아가씨인데, 학교 수업이 끝나면 신부 수업의 일환으로 꽃꽂이, 베이킹, 영어, 활쏘기 등을 배우러 다닌다. 아가씨와 보디가드는 처음에는 서로를 낯설어하고 경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에게 애정이 생긴다. 그러다 아가씨의 아버지인 보스와 보스가 억지로 맺어준 악질의 약혼자로 인해 아가씨와 보디가드는 위기에 처한다. ‘보디가드’를 ‘하녀’로 바꾸기만 하면 정말 <핑거스미스> 같지 않은가? 아가씨가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설정까지 흡사하다.
<핑거스미스>의 팬이라면 <바바야가의 밤>은 꽤 흥미로운 읽을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핑거스미스>와 떼어놓고 보더라도 <바바야가의 밤>에는 특별한 재미 요소가 몇 가지 있다. 우선은 ‘신도 요리코’라는 캐릭터가 재밌다. 신도 요리코는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일종의 격투가인 할아버지에게 학대나 다름없는 모진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했겠지만, 싸움꾼의 피를 이어받은 신도는 싸울 일이 생기면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이상한 인간으로 성장했다.
<바바야가의 밤>은 북스피어 출판사가 내놓은 ‘첩혈쌍녀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기도 한데, ‘각종 사건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해결하는 두 여성 주인공의 활약이 담긴 작품들을 소개할 요량’이라는 시리즈의 포부에 걸맞게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두 여자의 활약이 이어진다. 여성 주인공의 격투 장면이 이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도 요리코는 싸우고 또 싸운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는 난투의 연속이다.
한편, 싸움 장면 사이사이에는 신도와 나이키가 관계를 쌓아가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고상한 말로 비난을 하는 재주가 있는 새침데기 아가씨 나이키와 투박한 보디가드 신도가 점점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며 가까운 관계가 되는 과정은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다. 반전 장치도 재밌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일찌감치 알아차릴 반전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따라다니다가 반전에 그대로 당해버렸다. 내 눈을 믿지 못하고 앞 페이지로 돌아가 몇 번을 다시 읽을 정도였다.
왜 이렇게 재밌는 거지? 작가 소개를 보니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를 썼던 그 오타니 아키라였다.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는 출판사에서 추천사를 요청받고 읽은 것이긴 하지만, 여성 간의 관계나 여성의 내면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주변에 추천하고 다녔던 책이다. <바바야가의 밤>에는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에서 작가가 보여주었던 독특한 개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신도와 나이키는 스스로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신도는 해변에 서서 나이키에게 말한다. “나는 마귀할멈이에요. 당신과 함께 마귀할멈이 되려고, 여기까지 온 거죠.” 평생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피해 살아왔던 신도는 나이키를 만나 비로소 자신의 괴물성을 긍정한다. 남들과 좀 다른 존재일지 모르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다고. 그것은 매년 여름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며 내가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 축제에 가면 언제나 많은 사람이 광장 밖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광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은 괴물이라고, 지옥에 갈 거라고 확성기를 들고 소리친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은 이중적이었다. 나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직설적이고 신랄한 비난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당신들이 혐오하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지. 하지만 나는 나의 정체성 덕분에 점점 더 강해졌어.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혐오보다 강해.’
올해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는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서울에서 퀴어는 여전히 바바야가(마귀할멈)인 걸까? 서울광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퀴어들은 어디서든 축제를 열 것이다.
그러나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를 했던 것은 장소가 달리 없어서가 아니라 퀴어 정체성을 가진 사람 역시 서울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였다. 시민의 범주에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배제되는 순간, 시민은 그 말의 의미 자체가 깨어지고 만다. 한쪽에서는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축제가 위험하다고 주장하지만, 서울시에 사는 사람 중 누가 시민이고 시민이 아닌지를 가리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오히려 서울시가 직면한 위험일 것이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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