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청보랏빛 들꽃 정원

2023. 5. 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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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숙 수필가, 괴산 농부
붓꽃 행렬,여름 알리는 팡파르
초록빛 비비추와 만나면 환상
순수한 들꽃·옥수수 물결 풍경
내 취향에 딱 맞는 최고의 정원
자연으로 돌아온 20년 돌아본다
하고 싶은 대로 잘 살고 있을까

비 갠 아침이라 연초록이 선명하다. 이렇게 맑은 날엔 멀리 음성까지 내려다보이는 천상의 공간. 마루에 나와서 커피 한잔하다가 호미를 꺼내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일을 하다 새참으로 차를 한잔 마신 양 호미 들고 풀을 뽑고 있다.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별꽃을 뽑을까 망설이다가 그냥 꽃을 한번 보고 뽑기로 한다.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본래는 풀이었음에도 꽃이 아름다워 꽃인 양 연명해 가는 꽃이 개불알꽃이다. 이름은 망측해도 봄에 맨 처음 피는 꽃이라 그 청색 잉크 빛 설렘을 상상하며 캐어다 심은 꽃이 이제는 제가 주인인 듯 천지 사방으로 퍼져서 허브를 이겨 먹었다. 살다 보면 다 그런 거지 뭐,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모를 정원이 내 정원 취향일 테니까.

엔드리스서머 청아한 블루 수국을 좋아한다고 수국만 심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옆 종지나물도 미국제비꽃이란 이칭에 걸맞게 제비꽃처럼 예뻤고, 며칠 전에 막을 내린 남보라꽃 무스카리가 번뜩 나타났다 졌다. 너무 작아서 존재감이 없을지라도 강렬한 자기 색깔로 나 여기 있소 외치고 있었다. 올해 선전해 준 보상으로 한 귀퉁이에 무스카리 존을 만들어줄 참이다.

꽃들은 참 신기하게도 적당한 시간차를 두며 피어난다. 무스카리 지고 난 옆으로 보랏빛 아주가 꽃이 피었다. 아주가는 있는 듯 없는 듯 땅바닥으로 붙어서 조용히 영역을 넓혀 나가는 꽃이다. 이 아이는 약간 습한 곳을 좋아한다. 마루 밑으로 자꾸 기어들어 가서 꺼내 놓으면 또 들어가니 그냥 멋대로 취향대로 살라고 놔두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쉬지 않고 파란색을 보여주는 꽃은 바닷가에서 왔단다. 꽃집에서 산 적도 없고 지인의 집에서 업어온 아이도 아니다. 어느 해 여름 바닷가에서 신발에 묻어 이 산골까지 따라왔을까? 이 아이는 한여름 따가운 햇살에도 기죽지 않고 잘 자란다. 잎은 민트(박하)처럼 마주나고 뿌리로 뻗어 나가서 해마다 영토를 무한 확장 중이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채로 몇 년째 동거 중인데, 안방 창문 밑에서 키작은 정원을 담당하던 아이가 참골무꽃이란다. 진초록 맥문동 사이사이로 피어 있는 청아한 블루라 더 귀하고 예쁘다. 이제부터는 참골무꽃, 너의 이름을 불러줄게.

이제 며칠 있으면 피어날 붓꽃은 우리집 마스코트. 집으로 들어오는 길 굽이를 따라 에지(edge) 정원을 만들었는데, 둑 밑이라 자연스럽게 둔덕이 생겼고 돌을 골라내서 담을 쌓았더니 돌담이 일품이다. 돌담 밑으로 심은 붓꽃의 행렬은 여름을 여는 소리 없는 팡파르다. 고귀한 청보랏빛으로 여름을 알리는 고고한 자태는 그 누구도 넘볼 수가 없다. 돌담 밑으로 일렬로 늘어서서 정원을 덮어버린 초록빛 비비추와 어우러져 환상의 매스게임을 펼치는 듯 아름답다.

참 다행이지. 원예용품 컬렉터로 열광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내가 보석 같은 명품이나 자동차에 취미가 있었다면 아마도 집안을 쫄딱 말아먹고도 남았을 것이다. 호미 한 자루, 정원 앞치마, 엉덩이 방석 하나면 패션은 완성이다. 샤방샤방 원피스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트렌디한 남성적인 옷을 즐기는지라 몸뻬 위에 거친 질감의 조경 앞치마는 딱 내 스타일이다. 장화도 세 켤레, 호미도 세 자루, 앞치마는 스무 장쯤 가지고 있다. 욕심이 과한가? 장화는 괴산 읍내 만년고무 신발 가게에서 산다. 발목 장화부터 비 오는 날 밭에서 신는 무릎 장화, 간혹 장에 갈 때나 출근할 때 신는 레인부츠가 있다. 색깔도 아주 진한 핑크색부터 호피 무늬, 국방색으로 다양하게 갖추고 그날의 분위기와 비의 양에 따라 골라 신는다. 해마다 한 켤레씩 사서 신는데 새 장화를 사는 날은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호미는 농기구를 연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북쪽으로 갈수록 날이 좁아지고 날렵해진다. 중부지방인 이곳 괴산은 산이 많고 돌이 많아 뾰족한 호미를 사용해야 한다. 산골이라 땅을 건드리기만 하면 돌이 나오는 땅이다. 해마다 돌을 주워내다가 드는 생각인데, 이 돌로 산성을 하나쯤 쌓아도 될까?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해마다 밭을 갈고 수레 가득 돌을 주워 담는 우리를 보고 돌을 다 주워내면 가뭄을 탄다고 아랫집 할아버지께서 일러 주셨다. 가뭄에는 밤새 돌이 오줌을 싸서 돌밭에 곡식이 잘된단다. 어르신 말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하긴 돌을 들추면 지렁이가 그 축축한 돌 속에 숨어 있기도 하다.

요즘에는 새로 나온 톱낫이 여자들 일거리를 줄여주는 아주 핫한 농기구다. 여름으로 갈수록 호미로는 이겨낼 수 없는 풀과의 전쟁도 뿌리 부분을 잘라내기에 안성맞춤인 작은 톱낫 하나면 끝이다. 엉덩이 방석은 처음 보고는 사랑에 빠지기 시작해 지금도 밭에 나갈 때나 마당의 풀을 맬 때는 내 몸의 일부분이다. 호미가 점점 날씬해지고 결국 낫의 형태로까지 진화하는 걸 보면 모든 발명의 어머니는 쓰는 사람의 절실한 필요로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생활의 달인들께서 만든, 농사일에 딱 좋은 농기구를 볼 때마다 박수를 보낸다.

자투리땅에 늘 피고 지는 꽃밭이라 질서는 없지만, 정원을 이루는 꽃들은 블루와 청보라가 주인공인 순수한 들꽃으로 모아진다. 이제 곧 앞마당 옥수수가 무릎 높이만큼 차오를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또 다른 풍경을 선물하는 들꽃과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옥수수 물결은 내 취향에 딱 맞는 최고의 정원이다. 취향,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는 뜻.

자연으로 돌아온 20년을 살짝 돌아본다. 살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말랑해진 내 취향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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