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과 KGB, 마피아는 어떻게 러시아를 접수했나

김수미 2023. 5. 19. 10: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보며 10세부터 KGB 해외첩보 요원 꿈꾼 푸틴
공산 정권 붕괴하자 민주주의, 친시장주의자로 변신
부시장 시절부터 KGB, 마피아와 손 잡고 검은 거래
폭발사건 강경 대응으로 무명에서 영웅으로 떠올라
인기 위한 자작 사건 의심에도 1년만에 대통령 당선
언론, 신흥재벌 등 정적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재산 몰수

검찰총장 스쿠라토프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내기 위해 그와 가족의 뒤를 캐고 있었다. 옐친의 측근인 푸가체프는 수사를 막기 위해 스쿠라토프의 섹스 비디오를 입수했다. 그러나 비디오 공개 여부를 놓고 다들 머뭇거렸다. 그 때 막 FSB(정보기관 KGB의 후신) 수장인 된 푸틴이 나섰다. 푸틴은 스크라토프의 비디오를 방송국에 넘겨 전국민이 보도록 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푸가체프가 무명에 가까웠던 푸틴을 대통령으로 밀기로 마음 먹은 순간이다.

당시 푸틴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충성심이 높으며 순종적으로 보였다. 옐친은 푸틴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푸틴은 대통령에 오른 후 뼛속까지 각인된 전체주의 본성을 드러내고 철권정치를 펼쳤다. KGB를 중심으로 한 푸틴의 이너 서클 ‘실로비키’와 신흥재벌 ‘올리가르히’, 마피아는 그의 손과 발이 돼 정적들을 제거하고 러시아 정치와 경제, 사법시스템을 접수했다.  

신간 ‘푸틴의 사람들’(원제: Putin's People)은 푸틴과 전직 KGB 멤버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러시아 현대사를 조망한다. 6년간 러시아 특파원을 지낸 저자는 수많은 증인과 내부자 인터뷰,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푸틴과 그의 친구들이 거리낌 없이 민간 기업을 빼앗고 부와 권력을 이용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며 서방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했다.  

푸틴이 독일 드레스덴에서 KGB 해외첩보요원으로 활동할 때 그의 아내 류드밀라의 둘째 딸 카테리나. 출판사 제공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순박한 하수인?

푸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비에트 비밀경찰인 NKVD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으며 10세부터 KGB 해외첩보 요원을 꿈꿨다. 1985년 32세에 붉은 깃발학교에서 KGB 해외첩보 간부 훈련을 마치고 독일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그는 서방에서 수출이 금지된 첨단 상품과 기술을 밀수하고 동독 정치계 2군과 3군으로 깊이 파고들 정치요원을 포섭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러시아로 급거 귀국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1990년 2월 구소련에 민주주의 물결이 일며 70년 공산당 통치의 종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푸틴은 재빠르게 노선을 바꿔 민주주의 운동의 스타로 떠오른 숍차크 레닌그라드 주립대학 총장의 보좌관으로 들어갔다.  

솝 차크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푸틴은 부시장이 됐다. 당시 소비에트 붕괴라는 혼돈을 틈타 범죄조직이 보호비 명목으로 지역 사업체를 갈취하고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솝차크는 푸틴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겼다. 푸틴은 KGB 동료, 범죄조직과 삼각 동맹을 맺고 석유, 희토류 등 원자재 사업에 막대한 이권을 안겨주고 ‘옵스차크’, 이른바 돈주머니를 따로 차기 시작했다.

1996년 솝차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재선에 실패했지만, 선거유세 책임자였던 푸틴은 정치 중심지 모스크바에 입성할 기회를 얻었다. 크렘린의 해외재산부 책임자가 되며 아찔한 상승을 시작한 그는 1년 뒤 대통령 다음 세번째로 강력한 지위의 크렘린 지역 담당 행정 제1부실장으로 승진하고, 3개월만에 FSB 수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겨우 중령 계급이었는데, FSB 수상에 장성급 아래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푸틴은 FSB 수장이 되자마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경쟁자였던 솝차크의 전직 보좌관 유리 슈토프와 인권활동가 등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99년의 마지막 날, 옐친(오른쪽)은 순진한 하수인으로 생각한 푸틴에게 대통령 직위를 넘겨줬다. 출판사 제공
◆러시아를 접수한 푸틴과 KGB

1999년 옐친의 건강이 악화되자 공산당 보수파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옐친이 미국의 앞잡이라며 제거할 궁리를 했다. 그 때 푸틴이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의 섹스비디오를 터뜨려 수사를 막았다. 얼마 후 옐친은 푸틴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고, 무명의 젊은 정치인이 총리가 되자 온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체첸공화국에 테러 보복 전쟁을 벌인 후 무명의 정치인에서 대통령 권좌로 등극한 푸틴. 출판사 제공
존재감 없던 푸틴은 그해 9월 3주에 걸친 비극적인 테러사건 이후 스타로 떠올랐다. 아파트 등 건물에서 연이어 폭발사고가 터지면서 수백명이 희생됐는데, 범인으로 체첸반란군이 지목됐다. 푸틴은 체첸공화국 수도 그로즈니에를 공습하는 등 단호하고 강경한 대응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러시아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FSB의 자자극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듬해 5월7일 푸틴은 53%의 높은 득표율로 최초로 평화적 정권 이양을 이룬 러시아 대통령이 됐다. 

옐친 패밀리의 신뢰를 사기 위해 친시장적인 태도를 보였던 푸틴은 취임 후에도 자유주의적인 개혁안을 발표하고 가장 철저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를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세계 경제학자와 투자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푸틴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려 노력하는 등 서방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듯 했다. 마침 운 좋게도 석유 가격이 급등해 경제가 안정되자 푸틴은 국민들에게 러시아를 구원한 차르로 추앙받게 된다.

2000년 5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번쩍이는 안드레예스키 연회장을 걸어들어가는 푸틴. 출판사 제공
푸틴은 취임 직후 열흘 만에 지역 주지사들의 상원 의석을 없애버리고, FSB 출신 장성급과 크렘린 충성파가 지역을 감독하도록 했다. 언론이 이를 비판하자 검찰을 통해 대대적인 압수수색과 세무조사로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베레좁스키와 구신스키 등 언론 재벌 소유회사 지분을 빼앗고 공중파까지 접수했다. 
호도르콥스키(왼쪽)와 베레좁스키 같은 옐친 시대 올리가르히(신흥재벌)가 권세를 누리는 것은 푸틴이 취임하면서 끝났다. 출판사 제공
푸틴과 그의 친구들은 러시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산업도 장악하기 시작했다. 호도르콥스키 등의 올리가르히에게 사기, 탈세 등 각종 혐의를 뒤집어 씌워 노동수용소에 보내버리기고 회사를 빼앗았다. 운 좋은 인사들은 해외로 망명했지만 적잖은 이들이 의문사했다. 그렇게 빼앗은 돈은 푸틴과 그의 친구들 주머니를 채우고 자금 세탁을 위해 서방으로 흘러나갔다. 
한 때 러시아에서 가장 부자였던 호도르콥스키(왼쪽)가 탈세, 사기 등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는 모습. 그는 나중에 노동수용소로 쫓겨나고 푸틴과 그의 사람들에게 회사 지분도 뺏겼다. 출판사 제공
러시아 검은 돈의 자금세탁 통로로 이용된 대표적 사례가 도널드 트럼트 전 대통령이다. 트럼프가 타지마할 건설에 돈을 쏟아붓다가 개인 파산 위기에 놓이자 러시아 재벌들은 그의 이름을 딴 빌딩을 짓는 조건으로 거액의 명의사용료를 지불하는 등 계속 돈줄을 대줬다. 그 거래는 단순한 비지니스에 그치지 않고 미국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러시아 헌법을 개정해 2024년 대선에 출마할 가능성을 열어놨다. 그가 종신제에 성공할지, 러시아가 새 리더를 선택할지 알 수 없다. 푸틴과 그의 사들이 되돌려버린 러시아의 시계가 제자리를 찾기 바랄 뿐이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