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호소인’ 염경엽의 도루학 개론
● 도루 성공 +0.164점, 실패 –0.453점
● 성공 직후 타율 증가도 미미한 수준
● 메이저리그도 LG보다 도루 시도 적어
그런 이유로 'XXX 감독의 ◯◯학 개론' 같은 기사가 유독 자주 나오는 감독이 있다면 그는 명장 호소인으로 구분해도 무방합니다. 세월이 10년 넘게 흘러도 같은 기사가 계속 나온다면 그 감독은 거의 100% 명장 호소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감독이 그 '◯◯학'으로 한 번이라도 정상을 차지했다면 그런 기사가 계속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염 감독이 '우리 팀 지휘봉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날과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날 가운데 더 빠른 날이 오기 전까지 도루학 개론 수업이 이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이미 두 팀에서 한국시리즈 정상 도전에 실패한 염 감독에게는 '팀'만큼 '나'도 중요한 상황이니 말입니다. 야구에서 감독은 '홈런 사인'을 낼 수는 없지만 '도루 사인'은 얼마든 낼 수 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나'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고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징표 중 하나가 도루라는 말씀입니다.
감독은 어차피 선수 시절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투수 출신은 투수 관점에서, 타자 출신은 타자 관점에서 경기를 이해하고 풀어간다는 뜻입니다. 김재박 감독 역시 선수 시절부터 번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감독석까지 달려간 대주자'라는 평가를 들은 염 감독으로서는 주루 플레이에 더 신경을 쓰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도루는 몇 점짜리 플레이일까
염 감독은 시즌 개막 후 "보통은 도루 성공률이 75%는 돼야 이득이라고 하지만 나는 65% 성공률이라면 나머지 10%(포인트)는 다른 부가적인 영역에서 효과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도루 성공률 75%가 손익분기점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야구 팬들에게 상식으로 통합니다. 이 75%라는 숫자는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일단 '득점 가치(Run Value)'라는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명기자 호소인은 이렇게 세이버메트릭스 개론 수업을 시작합니다.)2020~2022년 3시즌 전 경기를 분석해 봅시다. 정상적으로 끝난, 그러니까 3아웃까지 모두 잡아낸 이닝에서는 평균 0.542점이 나왔습니다. 무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평균 0.542점을 기대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상황에서 타자가 홈런을 쳤을 때는 이닝이 끝날 때까지 평균 1.558점을 올렸습니다. 홈런을 치지 못했을 때는 0.520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1점짜리 홈런은 1.016점만큼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아웃 카운트와 주자 상황에 따라 총 24가지 경우를 놓고 모두 계산해 보면 홈런의 득점 가치는 1.486점이 나옵니다. 홈런은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벤트 가운데 득점 가치가 가장 높은 플레이입니다.
같은 식으로 계산해 보면 도루는 득점 가치 0.164점, 도루 실패는 -0.453점입니다. 따라서 도루를 세 번 성공해 0.492점을 올려놓아야 도루에 실패할 때마다 '까먹는' 0.453점을 채울 수 있습니다. 네 번 중에 세 번을 성공해야 이득이니까 75%가 손익 분기점이 되는 겁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계산하면 2020~2022년 3년 동안에는 도루 성공률 74.3%가 손익분기점이었습니다.)
LG는 이번 시즌 4월 30일까지 도루를 39번 성공시키는 동안 도루 실패 25번을 기록했습니다. 도루로 6.396점을 얻는 동안 도루 실패로 11.325점을 잃어 결국 4.929점 손해를 본 상황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에서는 약 10점을 더 얻을 때마다 1승을 추가로 올릴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LG는 도루 때문에 약 0.5승을 날린 셈입니다. 그러니까 "도루 때문에 진 경기는 없다"던 염 감독 말이 '아직은' 틀린 이야기는 아닌 셈입니다.
그런데 염 감독은 "한 경기 차이가 결국은 나중에 순위를 가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염 감독은 2019년 SK에서 단 1승 때문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놓친 경험이 있습니다. 두산 베어스와 나란히 88승 1무 57패(승률 0.615)를 기록했지만 상대 전적에서 7승 9패로 밀리는 바람에 2위로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가을 야구'에 약한 고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키움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염 감독은 포스트시즌에 10승 17패, 승률 0.370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루 성공하면 팀 분위기 올라갈까
네, 맞습니다. 염 감독은 분명 '도루에는 부가적인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염 감독은 "상대 투수들이 주자를 의식해 평소보다 빨리 던지려 한다. 타자에게만 100% 집중하는 투수보다 주자를 신경 쓰는 투수의 실투 확률이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도루가 팀 타격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도 도움을 준다는 의미일 겁니다.도루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도루는 기본적으로 1루 주자를 2루에 보내는 게 목적입니다. 지난 3시즌 성공한 도루 2723번 중 2455번(90.2%)은 1루 주자가 2루를 훔친 플레이였습니다. 그러면 주자가 1루에만 있을 때 타격 결과가 어땠는지 따져보면 도루가 투수의 실투 확률을 끌어올리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주자 1루 상황에서 타격 성적이 올라가는 건 사실입니다. 전체 평균 0.264였던 타율은 0.279로, OPS(출루율+장타력)는 0.734에서 0.794로 올라갑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요.
상대 팀에서 병살 처리에 유리하도록 수비 포메이션을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자가 1루에 있을 때는 1루수가 베이스에 붙어 있을 뿐 아니라 2루수와 유격수가 2루 쪽에 붙어 섭니다. 3루수도 유격수 쪽으로 옮기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다 보니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갈 확률이 올라갑니다. 2아웃에 주자가 1루에 있을 때는 이렇게 서지 않기 때문에 타율(0.267)과 OPS(0.733) 모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고로 와인드업으로 던질 때와 세트포지션으로 던질 때 투구 속도는 시속 1㎞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 기간 본인이 1루 주자일 때 OPS를 기준으로 타석에 서 있는 타자가 가장 좋은 기록을 남긴 건 SSG의 최정(36·1.171)이었습니다. 이어 KT 위즈 황재균(36)이 1.103으로 2위, 같은 팀 조용호(34)가 1.029로 3위였습니다. 느린 선수는 아니지만 빠른 선수도 아닙니다. 여전히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염 감독 통산 성적인) OPS 0.514를 기록한 타자가 주자 도움을 받아 OPS 0.714를 치는 것보다 평소 성적보다 떨어져도 OPS 0.900을 치는 타자가 팀이 이기는 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혹시 도루를 내준 다음에는 투수가 흔들리지 않을까요. 이 기간 주자가 2루에만 있을 때 전체 타율은 0.257이었습니다. 1루에 있던 주자가 2루 도루에 성공한 뒤에는 0.251입니다. 단, 출루율은 0.378에서 0.494로 오릅니다. 왜일까요. 1루를 채워야 병살타를 유도할 수 있으니까요.
뛰어야 사는 남자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도루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플레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야구에는 분명 도루가 반드시 꼭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2004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결정전(ALCS)에서 데이브 로버츠(51) 현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감독이 '더 스틸'(도루)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보스턴 레드삭스는 여전히 '밤비노의 저주'(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이후 우승하지 못한 불운)를 깨지 못했을지 모릅니다.‘우리 팀은 도루를 주무기로 삼겠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정말 도루가 그렇게 효과적인 무기였다면 염 감독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지도자가 여전히 도루 사인을 내느라 바빴을 겁니다. 도루 시도를 늘려보겠다고 베이스 크기를 키우고, 견제 횟수를 제한한 메이저리그에서도 LG보다 도루 시도가 많은 팀은 단 한 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몰라서 도루 사인을 아끼는 게 아니라 남들은 더 잘 알아서 상황에 따라 필요할 때만 도루 카드를 꺼내 드는 건지도 모릅니다.
과연 4월 마지막 날 쓰고 있는 이 글이 세상이 나갈 때는 '염경엽 감독의 도루학 개론'이 폐강 절차를 밟고 있을까요?
자체 폐강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염 감독 본인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염 감독의 야구는 어쩌면 '뛰는 야구'가 아니라 '뛰어야 하는 야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염 감독이 적어도 명장 호소인으로는 계속 존재감을 자랑할 수 있으니까요.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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