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로 종말한 지구에서 인간은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책과 세상]
어떤 시대의 디스토피아는 당대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독재자의 감시 사회를 그린 '1984'.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 아래에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 모두가 통제되는 '멋진 신세계'. 그리고 2023년 우리는 지금 어떤 위기와 직면하고 있을까.
SF소설계의 기대주인 천선란(30)의 '이끼숲'은 상상이 아닌 그야말로 눈앞에 닥친 '기후 위기'와 지구 종말 이후 지하로 쫓겨난 인류를 그렸다. SF소설 속 지구의 최후 시나리오는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오히려 머지않아 마주할 법한 광경이라 더 두렵게 느껴진다. '탄소를 줄이기 위해 숲을 전부 벌목해 이산화탄소 흡수율이 높은 품종으로 바꿔 심었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병에 걸리자 똑같은 품종으로 이뤄진 숲 전체가 앓았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불을 질렀는데, 지구는 계속해서 말라가던 터라 전 세계에 불씨를 품은 바람이 불었고 결국 전 세계에 검은 재가 휘몰아쳤다...'
그렇게 지상에서 밀려나 지하에 도시를 구축한 인간의 삶은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은 형국이다. '지하 도시의 인간은 다음 세대, 그러니까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세대들을 위해 인류 문명을 지속시키는 중간 다리이자 충실한 일꾼에 불과했으므로 나태함은 허락되지 않(168쪽)'았다. 한정된 자원으로 10년 동안 태어날 아이의 숫자를 통제해야 했기에 부부는 출산 계획을 위원회에 전부 보고해야 했다. 식사는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분 보충 행위에 불과했는데, 지하 도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VA2X'라는 알약(그러나 실제 약물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을 하루 한 알 먹어야 했다. 뇌에는 칩이 박혀 있어 출입하는 곳마다 신분을 확인하는데, 통제에서 벗어난 불순한 개인은 '정신재활원'에 가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지하 도시는 출구 하나 없는 '닫힌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 도시로 추방된 이후로도 인간은 반성하지 않고 종말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한다. 노동자를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톱니바퀴' 중 하나로 취급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임금인상을 목표로 경비 용역업체 노동자들이 반년 넘게 이어온 한 파업은 끝끝내 승리하지 못했다. 더 나은 계약조건을 약속하며 노동자들을 희망고문하던 회사는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 버린다. 산업재해가 비일비재한 건설현장은 복제 인간을 대안으로 삼는다. 다리나 팔이 잘리는 사고를 철저히 예방하기보다 복제 인간에게서 신체를 이식하겠다는 거다.
텁텁한 무채색 일색인 세 편의 디스토피아 연작 소설 속에서 다채로운 빛깔이 새어나오는 건, 중심인물인 동갑내기 친구 여섯 명이 등장할 때다. 마르코, 치유키, 의주, 유오, 소마, 톨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뿐 아니라 지상과 우주에 대해서도 호기심 넘치는 열여섯 살의 여름밤. 가상의 별을 볼 수 있는 공간인 '스페이스 스카이'에 모여 별자리를 보며 우정의 약속을 맺는다. '함께 흥미진진한 삶을 살자'고.
인간성의 상실을 종용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인간은 아주 작은 자극에 실존을 회복한다. 마치 작은 용수철처럼 외부 압력이 짓누르고 억압할수록 탄성은 솟구친다. 일터에서 만난 동갑내기 소녀를 알게 된 후 마르코는 '거울 앞에 서서 가르마의 방향을 다섯 차례 바꿔' 본다. 사랑에 눈을 뜬 거다. 출산 계획에 속하지 못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갇힌 채 사는 의주의 쌍둥이 의조는, 환풍구에 자신이 쓴 글자 아래 남겨진 '고마워요'라는 표식을 보고 처음으로 펑펑 운다. 존재를 인정받은 최초의 경험이기에. 건설 사고로 유오를 잃은 다섯 명의 친구는 급기야 탈출을 감행한다. 유오의 복제인간을 훔쳐, 생전 그가 무척 궁금해했던 지하 1층의 '온실'을 가자고. 그리고 알게 된다. 닫힌 지하 세계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했던 지상의 비밀을.
"구한다는 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막는 것인데 나는, 우리는 언제나 일이 일어난 뒤에야 그곳이 위험했음을, 우리가 위태로웠음을, 세상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마음과 같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구하고 또 구한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꿈을 땔감 삼아 서로를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구하는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서서 종국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인류뿐 아니라 그 이상,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에 필연적으로 닿게 된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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