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9. 우산국, 대마도를 누르다
■우산국 마지막 왕비는 대마도 수장의 딸
-울릉도에 관련 설화 구전(口傳)
우산국의 옛터 울릉도에는 오늘날에도 우산국과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설화들이 적지 않다. 지난 1997년 울릉문화원은 ‘울릉문화’ 제2호를 발간하면서 우해왕과 그의 왕비 풍미녀에 관한 설화를 소개해 관심을 끌었다. 우해왕은 서기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할 당시 이사부에게 항복한 우산국의 마지막 왕이다. 그런데 설화에 따르면 왕비 풍미녀는 놀랍게도 원래 대마도 수장의 딸이었다.
대마도가 어디인가. 한반도의 최남단, 대한해협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이고, 울릉도에서 거리로 따지면 뱃길로 무려 183마일(339㎞)에 달한다.
21세기 최첨단 교통문명의 시대에도 멀다고 느껴지는 거리인데, 1500년 전 우산국과 대마도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대마도 수장의 딸이 우산국 왕비가 된 것일까. 사연을 알기 위해 울릉군지에 소개된 설화 내용을 그대로 옮겨 살펴본다.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을 때는 우해왕이 다스릴 때였으며, 왕은 기운이 장사요, 신체도 건장하여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작은 나라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셌다. 당시 왜구는 우산국을 가끔 노략질하였는데, 그 본거지는 주로 대마도였다. 우해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의 수장을 만나 담판을 하였고, 그 수장은 앞으로 우산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항서(降書·항복 문서)를 바쳤다.
우해왕이 대마도를 떠나올 때 그 수장의 셋째 딸인 풍미녀를 데려와서 왕후로 삼았다. 우해왕은 풍미녀를 왕후로 책봉한 뒤 선정(善政)을 베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치를 좋아했다. 특히 풍미녀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건 들어주려 했다. 우산국에서 구하지 못할 보물을 풍미녀가 가지고 싶어하면, 신라에까지 신하를 보내 노략질해 오도록 했다. 신하 중에서 우해왕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거나 바다에 처 넣었으므로, 백성들은 우해왕을 매우 겁내게 되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졌다. “망하겠구나, 풍 왕후는 마녀야, 우해왕이 달라졌어.” 이런 소문이 우산국에 퍼졌다.
신라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있다고 신하가 보고하였더니, 우해왕은 도리어 그 신하를 바다에 처 넣었다. 왕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자는 죽인 것이다. 이를 본 신하들은 되도록 왕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풍미녀가 왕후가 된 지 몇 해 뒤에 결국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
■왜구들 노략질 일상화에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
-우산국과 대마도 혼인동맹 분석도 가능
이 설화는 대부분의 설화가 그렇듯이 상당히 극화된 감을 지울 수 없으나 질긴 생명력으로 오늘까지 울릉도에 전해지는 것이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설화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일까.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시대 정황과 우산국의 항해 능력, 군사력 등을 파악해야 한다.
설화에 따르면 우해왕이 대마도로 간 것은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정말로 왜구들이 동해안에서 설쳐댔을까. 그것은 사실이다.
신라 중·고기를 통틀어 침략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왜인(倭人)들인데, 왜인들의 노략질 기사는 우해왕이 우산국을 다스리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5세기에 유난히 많다. ‘왜인들이 금성(金城)을 열흘 동안 포위하고 있다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이 병사를 내어 추격하려고 하자 신하들이 “병가(兵家)에서 궁지에 몰린 적은 뒤쫓지 말라고 했다”며 말렸다(눌지왕 28년, 444년)’는 등 5세기를 관통하는 신라 역사에는 왜인들의 침입 기록이 즐비하다. 금성이라면 신라의 수도가 아닌가. 그 수도의 도성이 왜인들에게 열흘이나 포위돼 있었다고 한다면 국가 비상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만주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도 ‘영락(永樂) 10년(광개토대왕 9년, 서기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고, 왜(倭)를 격퇴했다’는 내용이 등장했을까. 왜인들이 설쳐대는 것이 당시 신라에 얼마나 큰 골칫거리였는지를 옛 사서(史書)와 금석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왜인들이 침략과 노략질을 일상화했다면, 동해상의 우산국 또한 노략질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인들의 발호를 참을 수 없었던 우산국 우해왕이 그 근거지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러 나선 것으로 이해하면 어느 정도 추론이 되는 것이다.
향토 사가들은 이 설화 내용을 토대로 바다를 주 무대로 하는 우산국과 대마도가 혼인동맹을 맺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동해상의 양대 세력이 힘을 모아 신라와 고구려 등지의 육지 세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견제하면서 해상권을 더욱 든든히 장악하기 위해 동맹체제를 구축했다는 풀이다.
■고대인들 항해 능력 상상 이상으로 탁월
-우산국은 신라에서도 경계하는 강한 해상 세력
-고대인들의 항해 능력 유물로도 확인
그럼, 1500년 전에도 울릉도∼대마도 항해가 가능했을까.
양자 간의 해상거리는 앞서 밝혔듯이 339km에 달한다. 그것도 순전히 바닷길, 즉 배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기계문명이나 악기상 예측이 거의 전무했던 먼 옛날, 배를 움직이는 힘은 오로지 인력과 바람뿐이었으니 더욱 고도의 항해술이 필요했다. 설화 내용대로라면 우산국이 그 당시 천 리 남쪽 끝 대마도까지 자유롭게 항해 선단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해상 운용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이것 또한 대마도나 우산국의 지리적 위치나 여건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울릉도와 대마도는 지형 등에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산악지형이기에 농경지 재배 면적이 매우 적다는 것은 더욱 뚜렷한 공통점이다. 부족한 것은 외부에서 보충해야 한다. 대마도 왜인들이 신라 연안을 노략질 대상으로 삼아 항해했듯이 우산국 또한 그런 항해를 했다고 봐야 한다. 더욱이 대마도는 대한해협 사이, 육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부산에서 49.5㎞)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지만, 울릉도는 훨씬 먼 동해상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외딴섬이다. 항해 능력으로 따진다면 우산국 사람들이 훨씬 뛰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산국 복속 사실은 삼국사기에서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이전에 비지국(比只國·창녕), 다벌국(多伐國·대구), 초팔국(草八國·초계), 감문국(甘文國·김천), 골벌국(骨伐國·영천) 등 여러 소국을 병합한 사실은 한 줄 짜리 기사에 묶어 간단하게 정리한 데 반해 512년에 복속한 우산국은 상대적으로 매우 상세하게 위치나 정벌 과정 등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당시 우산국이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신라가 언젠가는 병합해야 할 강력한 경계 대상으로 손꼽고 있었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의 시대 정황이나 우산국의 항해 능력 등을 고려하면, 풍미녀 설화의 신빙성은 더 높아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난 2007년 필자가 현지 취재를 할 당시 울릉문화원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김성권 씨는 “문헌 기록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입으로 구전되는 전설·설화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우산국의 해상운용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고대인들의 바닷길 활용과 항해 능력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라는 것은 고고학적 유물로도 곳곳에서 입증된다. 경주 고분에서 출토되는 배(船) 모양의 5∼6세기 토기 그릇을 살펴보면 풍파가 상대적으로 심한 동해상의 여건을 고려해 예리하게 배의 이물(선수)과 고물(선미)을 높게 만들어 안전성을 확보한 기법이 눈길을 끈다. 신라가 왜(倭)의 침입 등에 맞서 수군력을 키우고, 동해 해상 교통로 활용이 증대되면서 배를 만드는 조선 기술도 그 당시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고대인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본 하지키(土師器)계 토기들이 발견되고, 한반도와 마주 보고 있는 서일본 지방에서도 한반도 특징을 지닌 토기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은 고대인들의 도전이 곳곳에 문화 교류의 소산을 남겼듯이 대마도까지 종단 항해를 어렵지 않게 행한 우산국의 해상 운용 능력이 우해왕과 풍미녀의 혼인동맹 설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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